연극 <오렌지 북극곰>, 너와 나 보통의 존재 (프로그램북 기재)

학년이 바뀌면 자연스레 기억에서 지워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오렌지 북극곰>의 소녀와 소년이 그렇다. 이들은 극이 한참 진행될 때까지 ‘소녀/girl’과 ‘소년/boy’로만 불린다. 둘은 비슷비슷하게 네모반듯한 아파트에 산다. 투명 인간처럼 학교를 다니지만, 왕따는 아니다. 소녀와 소년이 처한, 한국의 이혼 가정과 영국의 이민자 가정도 이제 더 이상 주류 밖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출하게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특별하게 못하는 것도 없는 보통의 존재.
평범하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평탄한 것은 아니다. 2살 때부터 겪은 엄마·아빠의 부재는 이들의 삶에 다양한 영향을 끼친다. 소녀가 갖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아빠를 향한 미움으로 이어지고, 소년은 아빠의 부재로 타국에서 가장이 된 엄마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는다. 헤어진 엄마를 만나고 싶어도 용기가 없는 소녀와 혼자 남을 엄마가 걱정되면서도 훌쩍 떠나고 싶은 소년. 게다가 소녀는 매일 아침 등교 전, ‘돼지털’이라 놀림 받지 않기 위해 40분씩 머리카락을 손질한다. 소년 역시 별로 잘하지 못하는 온라인 게임을 잘하는 척 허세 부린다. 외모 관리와 게임은 소녀와 소년이 중간 지대에 남도록 돕는다.
소녀와 소년의 이름은 지영과 윌리엄이다. 이들이 겪는 상황은 익숙해서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 가정불화나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 뒤틀린 교우 관계와 오르지 않는 성적 같은 고민은 청소년기를 통과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쉽게 판단되기도 한다. 지영과 윌리엄은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양식화된 하나의 덩어리로 판단될 위험도 당연히 높다. 이들이 평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고민은 같은 무게로 중요한 법이다. <오렌지 북극곰>은 평범하기에 외면되어온 이들의 혼란을 최대한 예민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포착해내는 데 집중한다.
연극이 선택한 언어는 독백이다. 작품의 70%에 달하는 독백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영과 윌리엄의 진짜 목소리가 들리는 유일한 창구다. 독백 안에서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감추거나 꾸미지 않는다. 이민자를 대하는 영국인들의 모순적인 태도와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세상이 원하는 외모에 맞춰야만 하는 여성의 삶도 독백에 있다. 독백은 개인이 가정과 학교, 국가라는 거대한 사회 속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없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다. 관객은 지영과 윌리엄의 일기 같은 독백을 통해 이들의 감정에 닿는다.
평범해서 자칫 두루뭉술할 수 있었던 캐릭터에 힘이 생긴 것은 2014년부터 이어진 오랜 프리프로덕션의 결과다. 지영과 윌리엄은 한국과 영국의 두 작가 고순덕과 에반 플레이시가 두 나라의 청소년을 직접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오렌지 북극곰>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아 언제나 혼자였던 이들의 소외감에 주목한다. 이 주제는 아이들이 실제 교실에서 느낀 ‘투명’이라는 이미지로부터 도출됐고, 15세의 아이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공간과 물건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었다. 느리지만 세심하게 10대와 연결되려는 노력과 태도가 <오렌지 북극곰> 그 자체인 셈이다.
성별도 인종도 다른 지영과 윌리엄이 서로를 알아보듯, 윌리엄은 본인의 세계에서 또 다른 지영을 찾아낸다. 언니의 죽음 이후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사라. 게임과 책의 세계에서 위안을 찾는 윌리엄과 사라는 서로의 빈 곳을 발견하고, 윌리엄은 비로소 내밀한 감정을 독백이 아닌 대화를 통해 뱉는다. 지영은 미묘한 변화를 알아챈 할머니의 도움으로 13년간 그리워하던 엄마의 세상으로 향한다. 지영과 윌리엄이 혼란을 공유하는 누군가를 찾은 후 얻는 것은 용기다. 그것은 상처 받은 친구와 함께 싸울 ‘밥심’이기도 하고, 죽음을 결심한 친구를 위해 쓰는 SOS 편지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침잠해온 이들의 변화가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렌지 북극곰>은 친구의 믿음과 가족의 지지 위에서 스스로 벽을 부수는 그 순간에 집중하며, 한 뼘 자라는 이들을 응원한다.
이번 2018년 공연에는 영국 배우들이 참여해 4년 전 국립극단이 세운 ‘글로컬’이라는 목표에 가까워졌다. 윌리엄이 이민자로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우리와 전혀 다른 생김의 배우를 통해 자연스레 구현된다. 한국어와 영어의 뒤섞임은 언어를 넘어 연결되는 공통의 감정이 있음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름을 확인하고, 같은 감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21세기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영의 씨실과 윌리엄의 날실이 교차하며 그려내는 그림은 분명 평범할 것이다. 대신 <오렌지 북극곰>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누군가의 눈에 평범해 보이는 그 결과물 역시 나를 찾아가는 치열한 과정 끝에 탄생한 것임을.
국립극단은 2011년 <소년이 그랬다>를 시작으로 다양한 환경과 위치에 놓인 청소년들을 무대에 담아왔다. 아주 사소하리만치 작아 보이지만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중요한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사랑과 우정, 죽음과 용서 같은 거대한 주제도 아이들이 겪어내는 일상적인 상황과 언어의 힘으로 객석에 전달됐다. 가장 예민한 시기를 담은 청소년극이 청소년만을 위한 연극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성인 관객은 자신이 지나왔던 시간에 공감하거나 여전히 지금을 괴롭히는 감정의 실체를 오히려 청소년극을 통해 확인하기도 한다. 그 결과 가장 평범한 사람이 겪는 가장 평범한 고민이 가장 극적인 연극으로 소개되는 순간에까지 왔다. 가장 보통의 존재는 그렇게 삶의 주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