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특, 지현우, 김무열이 이준기와 주지훈에 이어 ‘병사’라는 이름으로 뮤지컬 무대에 섰다. 지난 1월 8일 공연을 시작한 <프라미스>는 거대한 역사 속에 묻혀버린 일곱 병사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품이다. 세련된 음악과 안무는 ‘군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다양한 이력의 앙상블은 이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운다. 군뮤지컬을 포함해 2005년 이후 활발하게 제작된 관제 뮤지컬을 과거 뮤지컬 VIP 티켓만이 인생 유일한 사치였던 기자와 뮤지컬 평론가 지혜원이 만나 살펴보았다.
군뮤지컬, 새롭게 발견된 자원의 보고
장경진: 지난번 <프라미스>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김무열이 “군뮤지컬이 아닌 창작뮤지컬로 불러 달라”는 얘기를 했었는데, 공연을 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더라. 전쟁을 소재로 했지만 음악과 안무 등에 신경을 꽤 많이 썼고, 소위 ‘민족주의’로 비칠 수 있는 군뮤지컬에서 타파하려는 흔적들이 보였다.
지혜원: 개개인의 사연을 부각한 스토리도 그랬다. 대신 그러다보니 ‘One for all, All for one’ 같은 일곱 병사 사이의 끈끈함이 도드라지지 않아 이들의 희생이 정서적으로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휴머니즘을 강조해 사건의 네러티브 대신 캐릭터를 선택한 셈인데 그러기에는 캐릭터를 다지는 게 너무 얕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과 제한된 예산 안에서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집단의 지원으로 만들었다는 한계를 감안할 때 이 정도면 선방이지 싶다. 전체적인 짜임새나 밸런스는 아쉬웠지만, 나도 음악은 좋았다.
장경진: 요즘은 뮤지컬이 얼마나 어려운 장르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분명 잘 만들면 오랫동안 사랑받는 장르지만, 잘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 박효신이 자기 창법 그대로 부르는 군가는 하나의 기획성 상품이 된다. 근데 뮤지컬은 종합예술인데다 굉장한 협업시스템이라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 특히 캐릭터를 강조한 <프라미스>는 뮤지컬경험이 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바이브레이션이 강한 이현의 창법은 내가 지금 이현의 노래를 듣는 건지 <프라미스>의 넘버를 듣는 건지를 모르겠더라. 이특의 경우에도 그룹의 특성상 완곡을 부른 적이 별로 없다보니 솔로곡을 소화하는 게 쉽지 않고.
지혜원: 연습시간도 부족하고, 뮤지컬에 맞춘 트레이닝이 단기간에 되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군뮤지컬이 좀 더 체제를 갖춘다면, 예컨대 2년에 한 번씩 창작을 하고, 사이 사이 기존 작품을 레파토리화하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지금은 급하게 뚝딱 만들어내는 감이 없지 않다. 작품이 올라가는 시기도 일정치 않고 말이지. 시스템 정착이 필요하다. 군뮤지컬뿐 아니라 일반 뮤지컬에서도 경험이 부족한 유명인들로만 원탑, 투탑 세우는 건 버겁다.
장경진: 그래서 앙상블의 힘이 중요한 것 같다. 성악, 무용 전공자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은 징병제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웃음) 선과 태가 남다른 이들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지혜원: 부국강병을 생각했을 때도 (웃음) 무용 하던 사람이 군대 가서 몸이 굳느니 뮤지컬에 투입되어 자기 능력을 이어가는 게 나은 거 아닌가. <무빙아웃>은 베트남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지만 댄스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이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군뮤지컬이 살 수 있는 전략일 수 있다.
장경진: <미스 사이공>도 베트남전쟁을 얘기하지만 영국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6.25의 경우 우리가 직접 겪은 역사적 사실이라 전쟁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얘기가 한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지혜원: 틀을 깨면 된다. <고지전>이나 <여명의 눈동자> 같은 이야기들도 전쟁이야기다. 군대와 전쟁이라는 소재는 의외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많다. 군뮤지컬은 성악, 무용, 연기 등 장기를 갖춘 병사들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캐스팅에서 용이하고, 스토리 공모도 가능하다. 지금은 창작진과 배우만 있는 형국인데 결국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장기적인 기획이다. 이 역할을 주관사로 참여하는 한국뮤지컬협회가 할 수도 있고, 혹은 나도 시켜주면 잘 할 수 있는데. (웃음)
내가 못하는 것은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자
장경진: 지역별 문화재단이 생겨나면서 2005년 이후 <화성에서 꿈꾸다>, <탈> 등 다양한 관제 뮤지컬이 제작되고 있다. 2009년 <남한산성>의 프로듀서로 참여했었는데 관제뮤지컬은 어떤 식으로 제작되나.
지혜원: 모든 관제 뮤지컬은 뚜렷한 명분과 목적이 있다. 남한산성이 광주, 하남, 성남에 걸쳐 이어져있는데 성남문화재단에서 먼저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뮤지컬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남한산성이 브랜드’여야 하는 게 있었다. 그러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화제가 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 거고.
장경진: <프라미스>는 최대한 군스러운 것을 배제했지만, “기억해줘”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하고 <생명의 항해>는 “6.25 전쟁이 어느 나라와의 전쟁인지조차 모르는 청소년들에게는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행복이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제작의도를 밝히기도 했었다. 관제뮤지컬의 경우 명확한 목표가 있어서 자칫 삐끗하면 거기에 함몰되는 경우가 있다. 2010년에 장성군에서 제작한 <홍길동>에는 얼마나 살기 좋은 동네인가를 강조하는 대사들이 있었고, <피맛골 연가>는 재개발 당사자였던 서울시가 제작해 굉장히 아이러니였다.
지혜원: 공간에 집중하다보니 유례와 장점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의의이자 명분이다. 하지만 뮤지컬 시장을 확장한다는 개념에서 봤을 때 이 장르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자기 지역에 대한 이야기로 관심을 이끌어낸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다 극장으로 유통에만 참여하던 지역문화재단이 자체 기획제작능력을 키워간다는 면에서도 의의가 있고.
장경진: 지원금을 받으니 관객에 지불해야 하는 티켓가격도 많이 낮아진다. <피맛골 연가>는 세종문화회관이 같이 붙으면서 천원의 할인 행사 같은 것도 했었다. 대신 너무 그때 반짝이다. 오히려 <마인>이나 <생명의 항해> 같은 군뮤지컬은 지방 6개 도시 공연이라도 하는데, 일반 관제 뮤지컬은 한 번 가면 많이 가는 거더라. 공연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으니 얘기조차 할 수가 없다.
지혜원: 군뮤지컬과 마찬가지로 전문 인력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다. 경직된 관이라는 조직과 자유로운 예술 영역의 상식이 다르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마찰들이 결국 작품의 퀄리티에 흠을 남기기도 한다. 너무 자기 안에서만 하려 하지 말고 내가 못하는 게 있으면 아예 기획 단계부터 그걸 대행해줄 수 있는 곳과 손을 잡는 게 좋다. 주제와 소재는 지역색을 드러내더라도 제작은 상업제작자를 통해 상업적으로 계속 발전되어야 한다. 만약 <남한산성>이 성남에서 3-5년간 한다는 조건을 걸고 상업 제작사와 공동 제작을 했더라면 그 이후 제작사에서 작품을 유통했을 때 그건 성남의 브랜드가 찍힌 상태로 로열티를 받으면서 퍼지는 거다. 지금은 제작도, 유통도 너무 단발성이라는 문제가 있다. 생명력이 이어지지 않으니 창작자들도 선뜻 참여할 에너지를 받기가 어렵지 않겠나.
상업제작사든 재단이든 자체 브랜드가 핵심
장경진: 여러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뮤지컬은 상업 제작사가 시장의 주축을 이루고 제작사별 브랜드도 서서히 생기는 추세다. 그런데 연극의 경우 지난 한해 국립극단이나 남산예술센터 등 관 기반 조직의 활약이 뚜렷했다. 재정안정도를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스템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보다 한참 먼저 시작한 브로드웨이는 어떤가.
지혜원: 거기도 비영리공연단체들이 많은데 지원금을 받기는 하지만 대부분 민간으로 운영된다. 우리나라 문화재단들이 벤치마킹을 한다면 그들의 브랜드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비영리단체인 뉴욕 퍼블릭 시어터는 <코러스 라인>이나 <헤어> 등을 공연하기도 하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을 1년에 몇 번씩 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매년 여름 센트럴파크 안에 있는 델라코트 시어터에서 ‘셰익스피어 인 더 파크’라는 페스티벌을 무료로 열고, 앤 해서웨이 등 유명배우가 출연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라는 브랜드가 있으면 정통 연극이든, 현대적 재해석이든 혹은 무용극이든 형태는 크게 상관없어지는 거다. <렌트>나 <원스>가 초연된 뉴욕시어터 워크숍도 작품개발을 브랜드로 가지는데 그들의 포커스는 아티스트다. 극작가에게만 한정짓는 게 아니라 조나단 라슨처럼 작곡가가 될 수도, 존 티파니처럼 연출가가 될 수도 있다.
장경진: 꾸준히 자기 색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데, 단체장이나 예술 감독의 임기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문화적 토대가 얕다보니 성과주의로 가는 경향도 짙고, 지자체 평가제 등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페스티벌이 관제뮤지컬로 넘어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혜원: 관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특성으로 만드는 게 관 뮤지컬이 아니라 그 관이 가진 브랜드가 모여서 만들어진 게 관 뮤지컬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남문화재단에서 <남한산성>을 했으면 이후 다른 소설을 뮤지컬로 만들면서 성남은 소설을 뮤지컬화하는 곳, 이라는 브랜드를 만들면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역민을 분석하는 거다. 마포구 같은 경우는 20-30대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연극, 뮤지컬, 콘서트라는 장르의 구분과 상관없이 청춘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브랜드가 있어야 자체 유료회원을 받든 뭘 하지 않겠나. 누구 임기 안에, 혹은 하나의 작품으로 브랜드를 구축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