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곳에 잘 지어진 하얀 집, 인정받는 건축사 남편, 내조에 열심인 아내, 모범생 딸. 부러움을 살만한 이 중산층 가정의 속은 다 문드러져 있다. 아내이자 엄마인 다이애나(박칼린·김지현)는 16년째 조울증을 앓고 있고, 남편과 딸은 평범함을 위해 그 사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척 무리하고 있다. 늘 넉넉한 품으로 가족을 감싸 안는 남편 댄(남경주·이정열)의 얼굴엔 짙은 피로감이 깔려있고, 딸 나탈리(오소연)는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키며 새벽까지 교과서를 읽어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피아노 연주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한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병 덕에 다이애나 역시 밝고 기운 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은 16년 전 4월 어느 날에 멈춰 있다. 모두가 의무로만 살아내는 삶에 드리워진 그늘은 표현되지 않아 더욱 아우성칠 뿐이다.
반 발짝 더 가까워질 <넥스트 투 노멀>을 기다리며 7
지난 11월 18일 국내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Next to Normal)은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인 가족을 통해 평범한 일상 자체가 축복임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희생과 이해 끝에 비로소 화해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는 가족드라마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넥스트 투 노멀>은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사이코드라마라고 지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가족을 지배하는 것은 아들 게이브(한지상·최재림)로 대변되는 죽음. 20대 중반 아무런 준비 없이 임신과 결혼, 출산과 죽음을 맞닥뜨린 다이애나는 여전히 아들이 존재하는 환상 속에 산다. 댄은 살아가기 위해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나탈리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와 끊임없이 사투한다. 1, 2, 3층으로 이루어진 철골구조의 무대는 각자의 방이, 다이애나의 머릿속이, 아들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며 같은 공간에 있어도 모두 다른 생각을 하는 여섯 명의 인물을 그린다. 하지만 모든 두려움의 극복이 사실을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듯 다이애나 역시 딸에게 “네 오빠는 죽었다”고 고백함으로부터 비로소 치료가 시작된다.
주로 부모세대의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가족의 화해를 그리는 한국식 신파에 비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는 <넥스트 투 노멀>은 쿨하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고 현실적이다. 록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넘버와 퍼플, 레드, 그린의 조명은 어둠에 침잠하지 않고 극을 따스히 비추며 희망을 암시한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그들의 언어가 낯설다. <넥스트 투 노멀>은 인물들의 내면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인만큼 디테일한 일상적 연기가 중요한 작품이다. 하지만 록발성이 익숙하지 않은 남경주의 목소리는 종종 음악을 이기지 못했고, 박칼린의 부정확한 딕션은 집중력을 요하는 송스루 뮤지컬(특별한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되는 뮤지컬)에 약점이 되었다. 입체적 표현이 가능했던 나탈리 역시 다소 뻔한 방식으로 흐르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사이코드라마의 특징은 연기하는 이와 지켜보는 이가 함께 치유된다는 점에 있지만, <넥스트 투 노멀>은 그저 그들의 이야기로만 들리던 순간들이 있었다. 새로운 이야기, 유려한 음악, 참신한 무대. 한국에 당도한 <넥스트 투 노멀>은 반갑다. 하지만 이 작품을 받아들이기에 한국의 뮤지컬시장은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 슬프고 아프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연은 2012년 2월 1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