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펀홈>은 레즈비언 만화가 앨리슨 벡델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그래픽 노블에는 가족과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했던 앨리슨의 어린 시절과 클로짓 게이로 살아온 아버지 브루스의 삶,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 삶과 죽음, 문학과 역사가 방대하게 펼쳐진다. 뮤지컬 역시 그래픽 노블의 내용을 충실히 따른다. 다만 그래픽 노블과 뮤지컬은 서로 다른 시점으로 같은 듯 다른 작품이 된다. 그래픽 노블이 고민과 사유가 정제되어 완성된 형태라면, 뮤지컬은 앨리슨의 회고록 작업 과정을 현재진행형으로 담아낸다. 때문에 뮤지컬은 그래픽 노블에 비해 조금 더 날 것의 감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만화를 그리며 그때의 감정을 다시 마주한 앨리슨이 종종 머뭇거리는 것도 그래서다. 이러한 설정 덕분에 관객은 43세 앨리슨의 뒤죽박죽된 기억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며 <펀홈>을 ‘기이한 가족’이 아닌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모순과 역설은 <펀홈>의 큰 주제다. 대외적인 이미지와 욕망 사이를 오가는 브루스 벡델의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부모와 정반대의 삶을 선택한 앨리슨의 삶은 역설적이다. 그런 앨리슨이 아버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정체성의 고민 속에서 살아왔다는 진실을 알고부터다. 브루스와 앨리슨이 보여주는 60년 가까운 시간은 곧 성소수자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앨리슨이 아버지가 사망하던 때의 나이에 가까워지며 그를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바라보게 됐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특히 뮤지컬은 살아 숨 쉬는 배우들을 통해 이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브루스 역의 최재웅은 앨리슨과 자신에 대한 감정을 덤덤하되 섬세하게 그려낸다. 앨리슨을 향한 브루스의 마음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성소수자로서 먼저 살아온 그의 두려움이 자식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그만큼은 자유롭게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뒤섞여 억압이라는 잘못된 방식으로 전달된 것에 가깝다. 이러한 브루스의 양가적인 감정이 시공간을 초월해 등장하는 앨리슨의 기억 속에서도 작품의 중심을 잡아준다.
회고록이 1인칭 시점이라는 것을 떠올렸을 때, 결국 <펀홈>은 앨리슨의 이야기다. 뮤지컬은 9세와 19세, 43세의 앨리슨을 통해 기억들을 꺼낸다. 서로 다른 배우들은 각자의 시간대를 살아내며 앨리슨이 느껴온 의심과 반가움, 답답함과 자유를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설정은 기능적 충실함과 동시에 자신과의 화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극에서 같지만 다른 앨리슨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된다. 9세의 앨리슨과 43세의 앨리슨은 서로를 바라보고, 43세의 앨리슨은 19세의 앨리슨 뒤에서 그의 일기를 본다. 이 과정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 묻어두었던 상처를 꺼내고 용서하는 것에 가깝다. 레즈비언 딸과 클로짓 게이 아빠의 이야기라는 특수성 안에서도 보편성을 발견했다면, 누구나 이해하고 화해하고 싶은 사건과 대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과 마주하는 용기가 <펀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