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푸르른 날에>, 5.18의 명랑한 고해성사 (텐아시아)

1980년 5월, 남자는 대학생이었다. 낮에는 역사를 공부했고, 밤에는 야학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청순하고 사랑스런 연인이 있었으며, 때로는 그 연인에게 아이처럼 보채던 이였다. 배다른 형과 진실한 형제애를 나눴고, 연인의 동생에게도 충실했다.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았으며, 세상 그 누구보다도 투명한 웃음이 가장 돋보이던 사람이었다. 2011년 5월, 남자는 스님이 되어 있다. 민호라는 속세의 이름을 버린 채 불상을 향해 끊임없이 절을 한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차도 마신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 미소 뒤엔 누구에게도 비치지 않은 슬픔이 어린다. 31년 사이 남자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스물다섯의 그에게 닥친 시련은, 5·18이었다.
당신이 역사책 대신 봐야할 단 하나의 공연 8
<푸르른날에>를 접하는 관객들은 어리둥절하다. 연극의 소재가 5·18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한없이 통속적이고 과장된 연출에, 모르는 관객이라면 웃음 뒤에 가려진 진짜 묵직한 주제의식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딸의 결혼식에 맞춰 30년 만에 재회하는 두 남녀의 통속극은 “예쁘다는 표현도 적절치 않아, 사랑의 비너스랄까”, “혁명의 불똥으로 살다가 한 움큼 재가 된대도 상관없어” 같은 문어체 대사를 시종일관 변사처럼 쏟아낸다. 그동안 <락희맨쇼>, <칼로막베스> 등의 작품에서 도드라진 고선웅 연출 표 과장된 몸짓도 무대 곳곳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일사분란하게 행해지는 이 ‘뻘짓’들이 극 초반 관객의 마음을 붙들어놓는다. 그리고 연극은 모두가 무장해제가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야 서슬 퍼런 진검을 툭, 하고 꺼내놓는다.
열댓명 남짓한 시민군은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를 외치며 도청을 사수하고, 아비규환 속 유일하게 항복한 민호(이명행)는 잔혹한 고문을 당한다. 한 마리 개가 되어서라도 살아남아야했던 그의 변절은 결국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든다. 민호처럼 피하고 싶었으나 피할 수도, 피해지지도 않은 눈앞의 현실을 함께 목격한 모두는 그렇게 공범이 된다. 하지만 <푸르른날에>는 신학을 전공한 계엄군과의 에피소드 등으로 5·18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이 아닌 역사의 거대한 사건 속에서 한없이 이용당하고야만 나약한 인간의 삶으로 그려낸다. 특히 시인이기보다는 ‘전사’로 불리길 원했던 김남주 시인의 ‘학살1’과 ‘진혼곡’, 송창식의 ‘푸르른 날’과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은 적재적소에 삽입되어 대사보다 더 임팩트 있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과거를 고하고 자신의 죄책감과 스스로 화해하는 과정은 그 어떤 역사책보다도 강하고 경이롭다. “넘어졌으니 넘어진 곳에서 다시 서”라는 일정 스님(이영석)의 대사는 결국 이 작품이 5·18을 넘어 인간 자체를 향한 위로와 희망임을 깨닫게 한다.
푸르른 5월, 5·18을 소재로 한 연극 두 편이 준비되어 있다. 지난 10일 시작한 <푸르른날에>는 남산창작센터에서 29일까지, 역시 비극을 희극으로 풀어낸 <짬뽕>은 신촌 더 스테이지에서 6월 12일까지 공연된다. 거꾸로 흐르는 시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잊지 않고 계속 복기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