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김무열은 칠흑같이 잘 빠진 경주마 같았다. 주로 선 굵고 개성이 뚜렷한 작품에 출연해서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 일로 귀결되는 듯한 자기통제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영화 <최종병기 활>(이하 <활>)과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연기하는 본인과 관객이 좀 더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지지만 더 큰 변화는 어떤 분위기에서 감지된다. <쓰릴 미>와 <스프링 어웨이크닝>, <광화문 연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불안한 청춘의 초상이었다. 뜨거운만큼 실수도 많았고 어떤 순간에는 뒷걸음질도 쳤다. 하지만 <활>의 서군과 <아가씨와 건달들>의 스카이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걸고 전진한다. 그렇게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남자가 된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다”는 김무열도 지금 남자가 되는 중이다.
<활>이 관객수 600만을 넘었다. 그동안 뮤지컬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왔지만 영화는 스케일에서부터 차이가 나는데 체감하는 반응은 어떤가.
김무열: 나는 흥행은 커녕 <활>이 이렇게 블록버스터 영화인 줄도 몰랐다. 찍으면서 알았다. 이게 얼마짜리라고? 으하하하. 2009년에 <작전>을 찍을 때는 내심 흥행에 대한 생각이 있었는데 여론이나 관객들로부터 오는 피드백이 없었다. 오히려 DVD 파일이 풀리면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지. (웃음) 근데 지금은 길을 가면 사람들이 나한테 활이라고 그런다. “활이다 활!” (웃음)
서군은 남이(박해일)나 쥬신타(류승룡)처럼 특별히 멋있지도, 돋보이는 캐릭터도 아니다. 서군의 첫인상은 어땠나.
김무열: 그동안 악역을 주로 했기 때문에 선한 역이라는 점에서 도전의식이 생겼다. 하지만 임팩트가 없고 무작정 착하거나 뻔한 캐릭터일수도 있었다. 그럴수록 본질이 중요했고, 이 인물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한 관찰을 주로 했다. 그런데 사실 (박)해일이 형이나 류승룡 형님, 다 좋아하는 형님들이라 그런 것만 생각한 것 같다. (웃음)
<활>의 인물 중 가장 연약한 사람이 서군이다. 자인(문채원)과의 혼인소식에 딸꾹질을 하는 등 허당기가 다분한 도련님인 셈인데, 오래간만에 <일지매>의 시완이나 <별순검>의 오덕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김무열: 나를 잘 아는 동료들은 잘했다고 하면서도 가식적이라고도 한다. (웃음) 귀여워 보이려고 하거나 웃기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남이랑 싸우는 신이나 자인이를 구출하고 “부인”이라고 외칠 때 빵빵 터진다고 하더라. 그런 반응들을 보는 게 재밌다.
서군만 놓고 봤을 때 <활>은 온실 속에서 잘 자란 화초가 스스로 야생에 뛰어들어 잡초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같다. 어떤 식으로 보이길 원했나.
김무열: <활>에서는 한 청년이 남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싶었다. 서군의 각성에는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다. 부모님의 죽음을 눈앞에서 봤고, 부인마저도 끌려간다. 살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닥쳤고 혼수상태가 된 거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압록강변에서 청나라 군대가 조선인을 상대로 사냥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뛰어가는데 서군만 걸어간다.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뭔가 한 번 해봐야겠다,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액션에서도 그동안 무술을 책으로만 배운 듯한 어설픔과 머뭇거림이 각성 이후에 사라지더라.
김무열: 그야말로 살기 위한 몸부림의 액션이었다. 청나라 군사와 1:1로 대결할 때 내가 다리가 길어서 살아남았지만 (웃음) 그 군인을 죽일 때는 정말 야구배트를 휘두르듯이 확 칼을 내리쳤다.
죽음을 초월하면서 도리어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기고 누군가를 지켜야겠다, 라는 자세로 변화한다. 서군을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일까.
김무열: 죄책감과 무력감. 그런 것들이 사람을 한도 끝도 없이 잡아 끌어내리는 것 같다. 남이가 자인이 어딨냐고 다그칠 때 부모님도 자인이도 지키지 못했다고 스스로 얘기하는 장면이 있었다. 편집됐지만. (웃음) 서군은 소위 폐인이 되어 그 안에 파묻혀 평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찌됐건 여러 사건과 행동적 인간인 남이를 계기로 그 안에서 나와 행동하는 인물이 된다. 아직은 좀 더 내 모습을 보면서 연구해야 될 부분이지만 그런 변화의 과정이 잘 보여졌으면 좋겠다.
워낙 고민도, 생각도 많은 성격이라 그런지 아쉬움이 많아 보인다.
김무열: 역시 활을 못 쏴본 것이 가장 아쉽다. (웃음) 촬영 끝나고 외국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인 반성을 많이 했다. 우리도 CG를 많이 썼지만, <트랜스포머> 같은 경우엔 대부분이 CG다. 그런데 그 안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은 너무 너무 절실하고 치열하다. 진짜 생존의 현장에서 뛰는 느낌이랄까. <활>에서 과연 나는 그런 이성과 감성으로 이 작품에 임했는가를 계속 생각했다. 활이나 칼 같은 무기가 주는 공포와 예리함이 있는데 그 상황의 긴박함을 내가 더 생각해야하지 않았나 싶다. 어쨌건 연기는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죽어라 해야되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촬영을 하고 있는 그 당시에는 죽어라 하고 있지 않았겠나.
김무열: 뭔가 이것저것 생각이 들더라. 반성일수도 있고 발전을 위한 고민일수도 있고.
최근에는 기존과는 다른 성격의 작품들을 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활>과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면서 김무열이 멜로에도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김무열: 서군과 자인 사이의 관계나 감정이 좀 더 들어갔으면 좋았... 으하하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오는 대본들도 약간 남자느낌이 많다. 예전이 청년이었다면 이제는 성인남자. 예를 들면 베드신도 있고, 추잡해 보일 수 있는 남자도 있고. 그동안 말로만 ‘서른이면 남자배우의 전환점’ 이랬었는데 서른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웃음)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변했다는 것이 좀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 삶의 패턴들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아가씨와 건달들>의 스카이는 여유도, 아픔도 있다는 면에서 좀 더 확실히 남자, 라는 느낌이 있다.
김무열: 도박에서 져본적이 없으니 돈도 많고,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자신감도 넘치는 사람이다. 밤의 고요함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 사랑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부분도 있다. 그래서 스카이는 무료하고 외롭고 아프다. 극 중 사라(정선아)가 “그게 당신의 진심이라고 믿어요”라고 할 때 스카이가 “나의 진심?” 이런다. 그냥 대사만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신인데, 스스로에게 묻는 거지. 도대체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의 진심은 뭐였을까. 그런 부분들이 나랑 맞닿아있는 것 같다. 진짜 내가 누구인가, 그런 질문들. 하지만 사실 스카이를 하기에 나는 너무 어리다. 5년만 있다가 해도 더 잘했을 것 같다.
표현에 한계를 느끼나.
김무열: 요즘은 간접경험이 아닌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내가 지금 흉내 내기에 그치고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있고. 정장 입고 목소리 깐다고 무조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아들레이드 역의 (김)영주 누나가 부럽다. 싱크로율이 한 150% 정도 되는 것 같다. 공연 끝나고 “수고 하셨습니다” 이러면 “너 또한” 이러시고. (웃음) 캐릭터가 굳건하게 딱 서있으니까 같이 무대에 서면 내가 붕붕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코미디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인데, <삼총사>에 출연할 당시에도 애드리브를 위해 만들어진 장면을 할 때마다 등에서 땀이 난다고 했었다.
김무열: 여전히 코미디는 정말 힘들다. 그래도 경력이 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니까 조금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전보다는 얼굴에 철판 깔고 밀어붙이는 힘, 용기가 생겼다. (웃음) <아가씨와 건달들>은 고전인데 품위 있게 웃겨야 된다. 관객들이 웃는다고 거기에만 맞춰서도 안 되고 매번 캐릭터가 무너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공연 시작 전, 잠들기 전 다시 한번 대본을 보고 감정을 정리한다.
김무열을 키운 것의 8할이 고민인 것 같다. (웃음)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 가장 본인의 나이에 가까운 차기작 <개들의 전쟁>이 현재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김무열: 딱 서른 되기 직전의 남자애들 이야기다. 그래서 닿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경기도 변두리 지역에서만 살아온 할 일 없는 청춘들 이야기인데 여자분들이 보기 불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입만 열면 욕이다. (웃음) 근데 이 나이 아니면 언제 찍어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하기로 했다. 극 속 사건들이 커다란 임팩트도 없고, 행동도 시원하지 못하다. 하지만 남자들이라면 공감할 이야기들이고, 감정이 디테일하게 살아있다. 상업적 콘텐츠들이 가진 드라마의 경사가 45도라면, 이 작품은 25도 정도?
앞서 말했듯 김무열을 보는 인식이 이제 더 이상 청년에 머무르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진짜 남자, 진짜 어른이란 어떤 사람인가.
김무열: 모호하지만 일과 사랑, 가족 모두를 떠안을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 남자로서의 이상향인데 잘 안 된다. 하하. 자기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 가장 멋있는 것 같다. 근데 난 아직 멀었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많이 겪어보고, 더 살아봐야 될 것 같다. (웃음)
많은 사람과 상황을 겪으려면 그만큼 잘 놀아야 가능한 일이다. 일 외적으로는 그다지 많이 놀 것 같지 않은데, 일로서 경험할 수 있는 폭이라는 게 참 좁지 않나.
김무열: 되게 신기하다. 내가 3일 전부터 고민하던 거다. 어느 순간 내 사이클이 연습, 촬영, 동료들과의 술자리 그것뿐이더라. 새로운 인간형을 만날 수 있는 것들에도 조금씩 제한이 생기다보니 그런 경험적인 부분에서 거리감이 생기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혼자 위안 삼은 게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 대해 더 깊고 많이 안다면, 동료가 아닌 인간적인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상충하지 않을까 싶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여전히 연습 외의 자리들이 소중하고 나에겐 필요하다. 술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웃음) 술자리도 중요하다. 남자들끼리 방 잡고 술 먹고 사우나 같이 다녀오고 그런 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