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강수진 (텐아시아)

“재능이란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용수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줄 알아야 하고, 함께 춤춘 이와 관객이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해야한다. 그게 무용수의 재능이지만 일부의 뛰어난 이들에게만 있다. 강수진에게는 그것이 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예술감독 리드 앤더슨은 강수진의 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찬사가 과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까멜리아 레이디> 3막에서 보여주는 9분의 환희는 앞선 문장을 현실로 그려내기에 충분하다. 강수진이 오는 15일부터 17일까지 <까멜리아 레이디>로 다시 한국을 찾는다.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자전적 소설 <춘희>를 바탕으로 한 <까멜리아 레이디>는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던 마르그리트가 순수한 남자 아르망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감정적 몰입이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발레리나 강수진을 만났다. 직접 만난 그녀에게는 상대방을 저절로 조아리게 하는 기품과 우아함이 있었고, 그 사이에 빛나는 해맑은 미소는 그 자체로 눈부셨다. 그 순수야말로 강수진이 여전히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이유가 아닐까.
<까멜리아 레이디>에 대한 애착이 강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은 지점은 어떤 부분인가요?
강수진: 처음 책을 읽었을 때부터 마음에 와 닿았고, 그래서 안무가와 작업할 때 굉장히 자연스러웠어요.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감성적이고 섬세해요. 스토리와 주인공의 감정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감성이 안무로 잘 표현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맡은 마르그리트의 감정을 춤으로 잘 표현해야 비로소 그 인물과 스토리를 잘 보여줄 수 있어요. 게다가 파트너인 마레인 라데마케르와의 호흡이 너무 잘 맞는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에요. 처음부터 호흡이 맞는 무용수는 굉장히 드문데 마레인과는 음악성과 타이밍까지 잘 맞았어요. 굉장히 똑똑한 친구에요. (웃음)
감정을 다루는 작품이라 그런지 쇼팽의 휘몰아치는 음악이 극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로 느껴집니다.
강수진: 마치 쇼팽이 이 작품을 위해 작곡을 한 듯 스토리와 음악이 너무 잘 들어맞아요. 특히 주인공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기 때문에 역할과 작품을 이해하는데 더없이 많은 도움을 줘요.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음악인 것 같아요.
춤을 추는 것만큼 음악적 이해도 발레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강수진: 발레는 음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이죠. 음악에 대한 이해가 춤을 어떻게 표현해느냐와 직접적으로 연결돼요. 그래서 음악에 대한 지식이나 감각도 춤 못지않게 매우 중요해요. 음악 자체를 발레 작품으로 만든 것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음악을 들으면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어요. 다음 생에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오페라를 매우 좋아하는데, <토스카>에 카바라도시가 연인 토스카를 향해 부르는 사랑의 노래 ‘Recondita armonia’(오묘한 조화)라는 곡이 있어요. 그 중 ‘예술은 신비로운 힘으로 서로 다른 두 아름다움을 하나로 만든다’라는 가사가 있죠. 제가 발레를 사랑하는 이유에요.
10년 전, 같은 작품으로 한국 관객들을 만났는데요. 30대와 40대에 느끼는 마르그리트는 어떻게 다른가요?
강수진: 저에게는 지금의 <까멜리아 레이디>가 역할에 접근하기 훨씬 더 쉬워졌어요. 그 동안 많은 인생의 경험과 공연들을 하면서 더욱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이런 경험들이 감정 표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캐릭터 자체를 살찌우는 것 같아요. 물론 30대에도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역할을 선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이해가 있었지만, 지금은 마르그리트나 전체 작품에 대해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됐고 저 스스로도 무대에서 즐기고 있다는 걸 느껴요.
무엇보다도 이번 내한이 마르그리트로는 마지막 공연이라는 점 때문에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강수진: 아무래도 발레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매년 한국에 올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다른 나라에서 마르그리트를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다시 한국에 들어온다고 해도 몇 년 뒤에나 가능할 테니까요. 언제 은퇴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번 한국에서의 <까멜리아 레이디>가 전막공연으로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사실 강수진 하면 <까멜리아 레이디>를 비롯해서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의 드라마 발레로 유명합니다. 비극적이고 연약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요. 강인한 역할에 대한 욕망은 없었나요?
강수진: 특별히 그렇지 않은데 그건 그동안 모든 역을 많이 해봤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까멜리아 레이디>를 하지만, 방금 전까지는 일본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하고 왔거든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색을 이쪽저쪽으로 다 표현할 수 있었고 계속 하고 있으니까 나같이 행복한 여자도 없을 거예요. (웃음) 굉장히 나쁜 애도 됐다가 완전히 처절한 여인으로도 살았다가 완전히 코미디 인생도 하고. 그리고 사랑도 많이 받아보고. 얼마나 좋아요. (웃음) 지금도 너무너무 설레요.
다른 인터뷰에서 <마타하리>를 국내에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으로 꼽았는데요. 발레하면 우아함을 떠올리기 때문에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아요. (웃음)
강수진: 마타하리는 간첩이었잖아요. 댄서이기도 했고. 약간 섹시한 역이에요. 90년대 초, 젊었을 때 했었어요. 발레도 연기처럼 직접 경험을 해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마타하리> 같은 작품을 하면서 내 안에 이런 면도, 또 저런 면도 있구나 라는 걸 많이 느꼈어요. 그런 섹시함도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구요. 전 평소 그렇게 섹시하지 않거든요. (웃음) 그래서 발레를 통해 내 자신이 이렇게 풍부했구나 라는 걸 많이 알게 되죠.
그렇게 극단을 오가는 작품들을 하다보면 발레리나로서가 아니라 인간 강수진으로서의 혼돈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강수진: 당연히 공연 끝나고서는 금방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것도 이제 경험으로 좀 유연해졌어요. 젊었을 때는 시간이 좀 걸렸었죠. 심한 날은 하루에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케이트도 해야 되고, <까멜리아 레이디>의 마르그리트도 해야 돼요. 두뇌라는 게 놀라운 것 같아요. 이제는 많은 경험으로 채널 돌리듯 딱딱 돌려져요. 그런 게 예술인 것 같아요. 자기 자신에게 변화를 그렇게 금방 금방 줄 수 있다는 것 말이에요.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발레리나 중 한 분인데요. 여전히 뜨거운 그 힘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걸까요?
강수진: 작품의 이야기를 따라 제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었을 때 모든 감정들이 복받쳐 오면서 눈물이 나요. 이런 감정들이 너무 행복하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0대 때부터 사랑에 빠진 발레를 지금도 너무 사랑하고 있어요. (웃음) 나이가 들면서는 안무에 대해, 작고 섬세한 동작들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되었어요. 큰 것에 중점을 두는 이들이 있는데 오히려 작은 것에서 감동을 느낄 때가 더 많다고 봐요. 그리고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해요. 중요한 건 오늘이고, 지금 이 시간이에요. 많은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배울 수 있었고, 미래에 대해 스트레스 받는 건 괜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아티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강수진: 음... 중요한 게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자기 개성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모든 예술가들이 다 똑같을 수 없잖아요. 어느 분야든 테크닉이 많이 발달되어 있고, 무용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테크닉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고, 결국 그 안에서 자기만의 개성과 색깔을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쌓인 연륜만큼 더 다양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육체적인 부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장르의 한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강수진: 은퇴는 오히려 서른 즈음에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흔이 지나고 나니 더 재밌네요. (웃음) 신체 뿐 아니라 정신이 건강해서 오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가끔 컨디션이 좋다고 느껴질 때는 스무 살 때보다 훨씬 더 나을 때가 있어요. 사랑을 많이 받고 또 많이 주니까 젊은 것 같아요. 재미없는 답변이 되겠지만 정말 세밀하게 연습하는 것밖에 없어요.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연습을 해요. 예술에는 끝이 없어요. 여기가 끝이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예술 인생은 거기서 끝이거든요. 그런 가르침을 매일매일 새롭게 얻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이야기하는 시점입니다.
강수진: 저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제가 너무 사랑하는 작품들을 마지막으로 전막 하나씩 선보이고 있어요. 제가 스스로의 몸에 대해 한계를 느끼게 될 때면 그때가 바로 은퇴를 생각해야 할 시점 같아요. 지금 당장 은퇴를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언젠가 저도 은퇴를 하게 되겠죠.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은퇴를 해서도 예술과 함께하는 삶을 살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까멜리아 레이디>라는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강수진: 사랑하는 사람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전 어제의 지금보다 늘 오늘이 더 행복해요.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