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뮤지컬 결산 (텐아시아)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는데 요즘엔 거리에 뮤지컬 포스터들이 많이 붙어있어요.” 올 초 만났던 뮤지컬배우 최정원은 시장의 변화를 포스터에서 느낀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뮤지컬이 영화, 콘서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하나의 엔터테인먼트가 된 셈이다. 2009년 한해도 140여 편의 뮤지컬이 관객을 만났다. 내한공연을 포함한 라이선스 작품은 재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창작뮤지컬은 시즌을 이어나가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잘 짜여진 초연 작품이 큰 활약을 보였다.
대중을 무대로 불러 모은 스타의 뮤지컬 진출
올 한해 도드라지는 이슈는 단연 스타들의 뮤지컬 진출이다. 그들의 무대 진출이 기존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올해는 유난히 이름 있는 스타들이 16%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했다. 유준상, 박건형 등 무대에 뿌리를 두었던 이들은 물론이고 윤도현, 승리, 제시카 등의 가수와 주지훈, 최지호 같은 모델출신 배우들도 시류에 합류했다. 다양한 분야의 스타들이 뮤지컬에 출연했지만 이들은 시장의 판세를 뒤엎는 조커보다는 일반 대중들을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편입시키는 에이스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조승우나 아이돌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사실 수익창출보다는 홍보의 개념으로 캐스팅이 이루어진다”는 한 뮤지컬 관계자의 말처럼 스타의 이름은 다수의 방송출연으로 이어지며 대중적 장르로 다가갔다. 하지만 때로는 인기에 편승해 무리하게 공연을 하게 되면서 작품자체에 독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에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는 “스타 출연 자체가 아닌, 자격이 미달되는 스타를 기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은 늘어나는 제작편수에 비해 높은 기량과 티켓파워를 가진 뮤지컬배우들이 한정되어 있어 겹치기 출연이 빈번하고, 작품이 아닌 배우 중심으로 티켓예매가 이루어지는 만큼 스타의 기용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하늘의 별이 무대로 내려오면서 뮤지컬배우들 역시 업그레이드를 위한 장르 변화를 시도했다. 올 2월 조정석, 양준모는 연극인 사이에서도 어려운 작품으로 손꼽히는 <아일랜드>를 공연했고, 다수의 뮤지컬 제작사는 연극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올 여름 뮤지컬해븐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를 제작, 최재웅, 임문희, 김재범 등 대부분의 배우를 뮤지컬배우로 채우며 연기에 대한 갈증을 숨기지 않았던 배우들과 연극무대에 생소했던 뮤지컬 팬 모두를 만족시켰다. 반면 “뮤지컬을 하면 할수록 음악에 더 깊게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는 이영미와 송용진은 솔로앨범을 제작해 개인 콘서트를 갖고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관객들을 만났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뮤지컬
2009년 배우들의 변화 못지않게 작품의 변화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국내 뮤지컬 제작사는 합작프로젝트, 페스티벌 진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세계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올해 총 8개의 상을 받은 <드림걸즈>는 한국의 대표 뮤지컬회사인 오디뮤지컬컴퍼니와 브로드웨이 스태프들이 함께한 100억 원대의 한미합작프로젝트였다. 1981년 브로드웨이 초연을 새롭게 리메이크한 이번 작품은 올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가량 한국에서 제작되어 총 19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드림걸즈>는 11월 22일부터 시작된 뉴욕공연을 필두로 시카고, 보스턴, LA, 시애틀을 거치며 약 1년여 간의 미국 투어가 진행될 예정이다. <지킬앤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등을 제작하며 외국에 로열티를 지급하던 회사에서 역으로 로열티를 받는 회사가 된 셈이다. 이 외에도 서울시뮤지컬단과 동경 긴가도 극단은 태평양전쟁에 징용되었다가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던 조선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침묵의 소리>를 공동 제작했다. 특히 이 작품은 크리에이티브팀 외에도 실제 일본 배우들이 직접 출연해 또 다른 합작프로젝트가 되었다.
창작뮤지컬에서도 세계화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창작지원작으로 선정되었던 <마이 스케어리 걸>은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을 무대화한 작품으로, 올 10월 뉴욕뮤지컬페스티벌(NYMF)에 공식 초청되어 최우수 신작 뮤지컬상과 연기자상을 받으며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특히 DIMF와 NYMF는 전략적 제휴를 맺고 매년 새로운 작품을 각 페스티벌에 소개하게 되어 내년엔 <스페셜 레터>가 뉴욕 무대에 선보일 예정이다. 전 세계 공통언어인 사랑을 다뤘던 <마이 스케어리 걸>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역색이 짙은 ‘군대’라는 소재의 <스페셜 레터>가 내년 어떤 반응을 얻느냐에 따라 국내 순수창작의 세계화의 방향성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경기침체가 가져온 장르의 획일화
스타가 출연하고 해외에서 상을 받는 등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뮤지컬 시장 내부는 사실 화려한 외면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미합작프로젝트인 <드림걸즈>의 경우 문화적 이질감 외에도 환율상승으로 인해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고, <카페인 시즌2>는 공연도중 제작사 대표의 구속으로 공연이 중단되었으며, <더 라이프>와 <갬블러> 역시 공연시작을 20여일 앞두고 취소되면서 예매관객들에게 전액 환불해주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또한, “단체관람이 작품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뮤지컬시장에서 신종플루는 하나의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기본적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 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올 가을에는 신종플루로 폭탄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쉽게 들려왔다. 실제로 상당수의 어린이뮤지컬은 신종플루로 공연을 잠정연기하거나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편적인 공연중단과 관객 수 감소보다 더 큰 문제는 장르의 획일화라는 점이다. 경기침체로 인해 영화나 음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대의 공연은 제작자와 관객 모두 안전한 선택만을 가능하도록 했다. 제작자는 소위 돈 되는 작품 위주로 공연을 올리고, 관객의 경우 접근이 어려운 만큼 검증이 완료되었거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경기침체 외에도 마니아 중심에서 대중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올 한해 좋은 성적표를 받아든 작품은 코미디, 쇼뮤지컬, 혹은 한국정서에 맞게 각색된 작품들이었다. 미국, 영국 외에도 프랑스, 체코 등 다양한 국적의 뮤지컬이 선보였지만,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위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현재 공연 중인 <스프링 어웨이크닝> 정도가 올 한해 가장 색다른 작품이었지만, 제작사 내부에서도 “한국관객들이 많이 어려워했고, 마케팅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다.
창작뮤지컬을 주목하라
2010년이면 1966년에 시작된 한국 뮤지컬이 44년째를 맞이한다. 새롭게 유입되는 관객들은 많아지고, 관객들의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져만 간다. “과거와 달리 공연되는 작품은 많지만 기다려서까지 보고 싶은 작품이 없다”는 한 마니아 관객의 말처럼 커져가는 시장발전을 위해서는 스타의 출연도 해외진출도 중요하지만, 내실 있고 다양한 작품들이 소개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 하반기에 등장한 <영웅>, <퀴즈쇼>와 같은 창작뮤지컬을 주목할 만하다. <영웅>은 뮤지컬배우 류정한의 출연으로 다수의 여성관객을 불러들였고, 안중근 서거 100주년이라는 시류에 맞춰 중장년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창작뮤지컬이라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무대와 웅장한 음악, 높은 기량의 배우들은 세련된 방식으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 다른 창작뮤지컬 <퀴즈쇼> 역시 김영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꿈을 잃은 20대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이제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인지되고 있다. 아이돌 못지않은 뮤지컬 팬덤이 생겨나고, 대중들 역시 라이선스와 창작뮤지컬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뮤지컬은 하나의 산업이냐, 단지 예술혼을 담은 제작자의 ‘취미생활’이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2010년의 뮤지컬은 과연 어떤 성적표를 받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