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전과] chapter.2 <빨래> (텐아시아)

단원의 특징 ① 작·연출가 추민주가 <옥상 위에 널린 사랑>이라는 제목의 구성안으로 시작한 한예종 연극원 졸업작품. 강릉에서 상경한 나영과 몽골에서 온 솔롱고를 중심으로 고단한 삶이지만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달동네 이웃들의 이야기를 희망으로 그렸다. ②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초연 이후 전국적으로 1500회 이상 공연됐으며, 현재 10번째 팀이 꾸려져 지난 9월 27일부터 오픈런으로 대학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몽골어를 배워봅시다: 솔롱고스(Solonγos)
오래전부터 한국을 지칭하는 몽골어로 뜻은 무지개. 우리나라의 ‘영희’만큼 흔한 여자이름이기도 하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솔롱고는 동생을 위해 한국에 왔지만 “아파요, 돈 줘요, 때리지 마세요”라는 말을 달고 산다. 공장을 다섯 군데나 다녔어도 받은 월급보다 밀린 월급이 더 많은 것은 물론이다. 따귀를 맞고, “불법”이라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아도,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지르는 솔롱고를 통해 <빨래>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상과 현실의 갭을 보여준다. 그동안 솔롱고 역에는 자연에서 나고 자란 몽골인에 걸맞게 김재범, 박정표, 홍광호, 배승길, 성두섭 등 주로 말갛고 순박한 얼굴의 배우들이 거쳐 갔다. 특히 지난 2009년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된 5차 <빨래>에는 임창정과 홍광호가 솔롱고 역을 맡았었는데, 캐스팅 조건이 ‘부티 나면 안 되는 외모’였다고. 그런데 훤칠한 키에 부티 나는 외모로 ‘참 예뻐요’를 부르는 남자가 나타났다!
음식을 만들어봅시다: 물김치
대기발령을 받은 나영이 술에 취해 찾는 엄마표 음식. 지난 2009년 관객과의 대화 ‘나영이Day’에서 나영 역의 조선명은 어머니가 실제 담근 물김치를 선물하기도 했다. “서울살이 몇핸가요”라 묻고 “서울 참 못됐죠”라 말하는 <빨래>에서 서울은 제3의 주인공이다.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상경해 서점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나영은 추민주 작가의 현신이다. 그 결과 보증금 500만 원짜리 옥탑방에서 보낸 시간은 <빨래>를 잉태했고, 2005년 희곡상 수상 당시 “성동구 자양동 노륜산 시장 인근 주민들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래서 <빨래>에는 학업 때문에, 직장 때문에, 지방에서, 외국에서 서울로 꾸역꾸역 몰려든 사람들 특유의 외로움과 서글픔이 짙게 깔려있다. 동네 구멍가게 사장님, 장애를 가진 딸을 40년 넘게 가두고 살아야했던 할머니, 오픈멤버였지만 사장 말 한마디에 잘리는 서점직원 등 단 6명의 배우가 15명 이상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이를 통해 서울살이 2년차부터 45년차까지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빨래>는 괴로움에 함몰되지 않고 도리어 지치지 말자고, 서로의 손을 잡자고 말한다. 결국 그 희망이 <빨래>의 라이선스를 일본에 팔게 된 계기가 됐고, 2012년 2월 도쿄와 오사카에서의 공연이 준비 중에 있다.
숨은 그림을 찾아봅시다: 청담보살
나영과 솔롱고의 동네에 있는 점집. 임창정이 출연한 5차 공연 이후 줄곧 무대 한 곳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지킬앤하이드>로 주목을 받은 홍광호가 <빨래>에 출연했을 당시 ‘지킬박사 약국’도 ‘청담보살’과 함께 있었다. <빨래>의 초기 부제는 ‘골목골목 뮤지컬’이었고, 그에 걸맞는 서사에 리얼리티가 강점인 여신동 디자이너의 엄청난 디테일이 만나 무대에 진짜 달동네가 만들어졌다. 옥상에 걸린 빨래들과 스티로폼에 키운 화초들, 동네 슈퍼 간판에 붙은 해태 마크 등 <빨래>의 무대엔 손때 묻은 아날로그의 정서가 내려앉아 있다. 특히 <빨래>의 전봇대, 문틀, 간판 등의 대도구들은 실제 달동네 폐허에서 발품을 팔아 가져온 것들이라고.
노래를 배워봅시다: ‘참 예뻐요’
솔롱고가 나영을 향해 부르는 세레나데. 극단 학전의 김민기 대표가 “(추민주는) 몸도 정신도 참 건강한 사람”이라 말했듯, 그가 쓴 가사와 <빨래>의 멜로디는 연신 착하고 따뜻하며 서정적이다. 동네 분위기에 맞게 트럭이 내는 후진음, 개와 고양이 울음소리 등이 효과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슬플 땐 빨래를 해’의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 시간이 흘러 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 슬픈 네 눈물도 마를 거야 / 자 힘을 내’라는 가사는 직설적이지만 그래서 직구로 관객의 가슴에 날아 들어온다. 내년부터는 “사회적으로 약자인 인물들이 잘 살아주길 응원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빨래>의 대본 일부가 중·고등학교 국어와 문학 교과서에 실릴 예정이다.
심화학습: <섹스&시티>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두 작품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서울과 뉴욕이 제3의 인물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과 친구가 유사가족이 되어 서로의 희로애락을 안는다는 점이다. <섹스&시티>에서 샬롯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의 소울메이트일 수도 있어”라는 말로 캐리를 격려했다. <빨래>의 주인할매는 따뜻한 보리차와 등을 쓸어주는 손,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제”라는 말로 나영을 다독였다. 주말임에도 아는 사람 하나 없어 외출할 수 없을 때, 눈물 쏙 빠지게 아파도 약을 먹기 위해 손수 밥을 해야 할 때, 반말과 성희롱으로 점철된 상사를 만났을 때, 소주 한 잔 생각날 때, 그 누구도 내 생일을 알아주지 않을 때 <빨래>를 보라. 150분 동안 느끼는 감정의 진폭은 의외로 크고,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 착해서 답답하다고도, 누군가는 결국 현실은 바뀌지 않은 것 아니냐고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빨래>는 모두의 인생이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크고 듬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빨래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