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된 시, Like
실존 인물을 다룰 때 가장 임팩트가 적은 경우는 시간순대로 나열할 때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의 일생을 모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이 한계는 약한 디테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관통하는 중심이 없어 인물의 존재감과는 별개로 이야기가 그저 휘발되어버릴 때도 있다. 뮤지컬 <랭보>는 이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시·공간을 섞고, 랭보를 둘러싼 인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윤희경 작가는 랭보와 베를렌느가 함께 보낸 3년에 집중해 이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시에서 조각모음 해 완성한다. 인물들이 관계 맺으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은 가사가 된 시를 통해 흐른다. 시의 저자는 확실해도 <랭보> 안에서는 솔로였다가 이중창이, 다시 삼중창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시가 완성되어 가는 상황 자체를 그려냄과 동시에 서로의 감정을 충실하게 대변한다. 랭보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들라에는 그와 함께 읽었던 ‘모음들’을 쓸쓸히 노래한다.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리프라이즈 되는 넘버들은 뮤지컬 작법에 충실하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으로 읽히는 시의 특성을 메타적으로 설명해내기도 한다. 서사와 넘버의 매끄러운 흐름은 관객을 자연스럽게 작품 안으로 초대하는 힘이다.
호불호를 부르는 파괴적 관계, Dislike
<랭보>는 전혀 다른 성향의 세 인물을 극에 등장시킨다. 그중에서도 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들라에는 가장 관객과 맞닿는 인물이다. 작품은 그가 랭보와 베를렌느를 바라보며 느끼는 질투와 열등감, 설렘과 자기연민 등을 통해 보편적 감정을 찾기 위해 애쓴다. 덕분에 <랭보>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세 인간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하지만 결국 <랭보>는 베를렌느와 랭보의 관계가 중심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가난과 고독의 한복판에 있던 랭보와 거짓된 의견들 속에서 자신을 혐오해온 베를렌느는 유일하게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뮤즈가 된다. 서로의 인정만이 절실하고 그만큼 질투도 강했던 파괴적 관계. 당연히 이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도, 이들이 경험하는 감정도 극단을 달린다. 게다가 ‘보들레르의 후예’가 되고자했던 랭보는 불행과 고통을 노래하고, 그것이 그들의 시를 빛나게 한다. 둘의 관계를 그린 영화 <토탈 이클립스>와 비교하면 뮤지컬은 많은 부분이 그들의 시 뒤에 숨겨져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랭보>에는 서로를 파괴하며 나아가는 관계가 모든 관객을 품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모두를 아우르는 절대적 보편성은 없다. 대신 관객은 <랭보>를 통해 모두가 경험하지는 않지만 한 인간이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느끼는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선택은 결국 관객의 몫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