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인>, 쇼가 끝난 뒤 (텐아시아)

귀도(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칭찬한다. 단, 칭찬 앞에는 늘 “초기작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는다. 그러나 영화감독 귀도에 대한 거품론이 존재하더라도, 여전히 촬영 직전까지 시나리오가 없어도 모든 것이 풀셋팅된다. 귀도는 “예스나 노만 외치면 되는” 디렉터가 아닌 “마에스트로”라 불리우는 사나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불후의 명작을 찍어내지 못하면 죽는” 신세. 귀도는 모두가 재촉하는 시나리오는 고사하고 스스로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기자회견장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도망간 스파에서조차 모두가 그를 알아보고, 답을 구하는 그에게 끊임없는 질문만을 던진다. 피로와 스트레스를 제외한 그 어떤 감정도 얼굴에 담지 못한 귀도는 과연 9번째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인>엔 퍼포먼스‘도’ 있다 7
2008년 한국 초연된 동명뮤지컬에 출연한 황정민이 “뮤지컬에 밝은 작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관객들이 많이 어려워했다”고 밝힐 정도로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환상을 교묘하게 오가며 감정의 정주행을 방해한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귀도 역시 ‘매력적이다’라는 사전적인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일 정도로 아홉 살의 소년 귀도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바로 그 아홉 살 소년 귀도에 있다. 원작인 1963년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에 비해 스토리적인 면에서 불친절하지만, <나인>은 세세한 스토리 대신 강한 콘셉트의 퍼포먼스로 귀도와 그의 성장을 함께한 여자들을 불러오고, 그들을 이미지로 기억하게 만든다. 특히 귀도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퍼포먼스는 그의 현실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욱 화려해지며 극의 클라이맥스를 끌어올린다.
영화 <나인>이 내세우는 강렬한 퍼포먼스는 실제 무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화려함으로 가득차있다. 페넬로페 크루즈라는 이름이 곧 은밀함으로 대변되는 귀도의 정부 칼라의 퍼포먼스는 거대한 핑크색 장막과 거울을 이용해 섹시함을 극대화하고, 그에 반하는 귀도의 아내 루이사(마리온 꼬띨라르)는 단아함과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며 정반대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퍼포먼스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외롭게 살아가며 아홉 살 귀도에게 처음으로 성을 일깨워준 사라기나(퍼기)의 무대다. 소년 귀도의 기억 속 사라기나는 모래로 가득한 무대 위에 검붉은 의상을 입고 한 손엔 탬버린을 든 모습으로 환생한다. ‘Be Italian’에 맞춰 선보이는 퍼포먼스는 가사와 안무가 절묘하고, 와이드샷과 타이트샷을 오가는 화면과 함께 펼쳐지며 12개의 퍼포먼스 중 단연 최고라 불릴만 하다. 12월 31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