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피조물 모두를 위한 80분 (프로그램북 기재)

<죽고 싶지 않아>는 위태로운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비스듬히 서서 아래를 바라보는 이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다른 쪽에서는 가파른 벽을 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기둥 하나에 의지한 채 흔들리기도 한다.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위험을 담보한 채 경계에 있다. 위와 아래, 문과 벽, 삶과 죽음. 한 끗 차이로 삐끗할 수 있는 곳에서 모두가 폭발하듯 몸으로 외친다. 죽고 싶지 않아. 무대를 가득 메우는 퍼포머들의 거친 호흡과 몸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마찰음이 그 어떤 말보다 더 절박하게 이들의 생존을 증명한다.
작품은 총 10장에 걸쳐 청소년들이 겪는 감정과 현실에 집중한다. <윌리엄 텔> 서곡에 맞춰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아이들의 일상은 고되다. 시도 때도 없는 감정 기복은 원인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를 향한 간섭과 억압의 반작용이 때로는 폭력이 되어 다른 누군가를 괴롭히기도 한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만, 경험이 적어 서툴고 실수도 잦다. 다수에 속하지 못하면 불안해하며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리하기도 한다. 이들은 클래식부터 헤비메탈까지 장르도, 분위기도 다른 음악 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 어떤 것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삶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무대. 이토록 막막하고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현실을 과연 청소년만이 맞닥뜨린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다채로워진 문명의 이기는 우리를 더욱 편리하고 빠르게 연결한다.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지워지는 일은 다반사다. 나와 남을 비교하며 자존감을 갉아먹고, 사회의 기준을 따르느라 자기 검열도 점점 심해진다. 서열화 된 구조 안에서 소수의 의견은 묵살되기 일쑤고,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고립을 알아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관객은 무대 위 청소년의 삶을 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그 삶은 청소년기를 지나던 과거의 내가 아닌 현재의 나에 가깝다. 류장현 연출가는 “청소년은 현재다”라는 말로 작품의 방향을 설명한다. <죽고 싶지 않아>는 ‘9세 이상 24세 미만’이라는 법의 정의를 넘어 흔들리는 모두가 청소년이라 말하는 셈이다.
이 혼돈은 지워진 나를 찾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혼돈과 불안은 미지로부터 시작된다. 때문에 불안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것은 자립을 위한 첫 걸음이 된다. 청소년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산만함은 실제 이들이 지나고 있는 시기에 판단과 조절, 예측을 관장하는 전두엽의 50%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발달 단계라는 인지는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자유를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수의 무리에 속하려 한다. ‘함께’라는 동질감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이상한 행동에 눈을 감는 일도 다반사다. 누군가에게 낙오된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뱃살이 많을 거면 참치로 태어날 걸”이라는 농담에는 피식 웃게 되지만, 이러한 자조는 사회적 기준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재의 나를 발견하게 한다. 익숙했던 것이 달리 보이는 순간은 작품이 진행될수록 더욱 늘어난다. 우리는 정체를 확인한 후에서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죽고 싶지 않아>는 발견을 통해 묻는다. 남의 기준에 맞춰 살 것인가, 나로서 살 것인가.
작품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질 거라는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살벌한 세상을 춤추며 견디자고 말한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생겨나는 감정을 올바르게 직시하고 솔직하게 몸을 통해 표현하자는 것에 가깝다. 설사 춤을 잘 추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움직임과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서의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지 않아>의 안무가 에너지 그 자체에 집중한 것과 같다. 때로는 그 길이 외롭고 고단하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무대에는 불안과 두려움을 뒤로 하고 살아남겠다고 땀을 뚝뚝 흘리며 춤을 추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그를 향해 박수를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외로운 퍼포머를 향한 응원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나로 서길 바라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정제된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춤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긴다. 춤은 관객의 닫힌 마음을 열고, 활짝 열린 감각을 통해 사유는 확장된다.
“We are so different, But the same inside our hearts.” 공연의 마지막, 퍼포머와 관객이 ‘Beautiful Creatures’에 맞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춤을 춘다. 무대의 원초적이며 자유로운 에너지는 객석으로까지 전달되어 너울댄다. 위태로운 이미지로부터 시작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죽고 싶지 않아>는 비비드한 컬러의 향연으로 마무리된다. <죽고 싶지 않아>를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구체적인 언어가 아닌 감각의 몸짓인 만큼 각자가 서로 다른 감정을 갖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80분이라는 시간 동안 내 마음에 피어난 감정을 찾아내 세밀하게 바라봤다는 것에 있다. 가능하면 관객 개개인이 발견한 감정이 건강하고 긍정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그동안 웅크리고 살아왔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