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라노>, 뮤지컬의 고전적 아름다움 (스테이지톡)

뮤지컬의 고전적 아름다움, Like
서사를 다루는 연극, 영화와는 다르게 감정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뮤지컬은 장르의 정의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때문에 뮤지컬에서 ‘환상’을 구현해내고 그것을 진짜로 믿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뮤지컬 <시라노>는 “환상과 속임수의 축제”라는 가사처럼 장르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뮤지컬이 가진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살리는 데 힘을 쏟는다. 사랑과 우정, 정의 같은 익숙해서 외면 받던 가치들은 뮤지컬 안에서 빛을 발한다. 록산을 향한 ‘순애보’로만 기억되던 시라노는 이 주제 안에서 능청스러움과 타협하지 않은 굳은 신념을 보여주며 로맨틱남과 동시에 영웅으로서의 타이틀도 갖는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작품의 이완을 돕는 것은 쇼스타퍼들이고, 가스콘 부대원들의 퍼포먼스는 극에 볼거리를 제공한다. 익숙한 듯 편안한 선율과 고음의 아리아는 극을 견인한다. 새롭게 편곡된 넘버들은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악기 자체의 소리에 집중한 서정성을 넘나들며 인물의 감정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청각적으로도 밸런스를 맞춘다. 특히 <시라노>는 장면의 미장센에 공을 많이 들였다. 얇은 구조물의 세트는 다채로운 조명을 받으며 ‘그림자’로만 존재했던 시라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따뜻하고 북적이는 파리 시내, 푸르스름한 여름밤의 발코니, 낙엽이 지는 오후의 수녀원처럼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냈을 법한 서정적인 분위기를 무대 위에 펼쳐놓음으로써 공간에 대한 자각은 물론, 관객을 위한 환상의 여백을 마련해둔다. 이로써 <시라노>는 서사 외에도 공간이 만들어내는 공기와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역시 뮤지컬의 한 부분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셈이다. 때때로 <시라노>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전작이나 <맨 오브 라만차>, <레미제라블> 같은 뮤지컬을 떠오르게 하지만, 관극을 완벽하게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가사, Dislike
시라노와 록산, 크리스티앙의 엇갈린 사랑은 푸르스름한 하늘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뜨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초여름 밤의 낭만 안에서 더 빛난다. 공들여 만든 서정성이 극장 안에 감돌지만, <시라노>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오히려 가사에 있다. 유려한 시라노의 글솜씨는 가사보다는 멜로디로 표현되었고, 가사의 많은 부분은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친다. 특히 부족한 개연성을 채우기 위해 일본 공연에서 대사로 처리되었던 장면을 음악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음악이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대신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능에 충실하자, 평범했던 문장들은 오히려 더 어색해졌고 음악 자체가 주는 매력은 반감되었다. 서사의 절정을 향해가는 2막에 이르면 이 변화는 더욱 도드라진다. 송모먼트와는 상관없이 음악이 수시로 등장하다보니 정작 힘을 줘야 할 넘버들이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친절이 언제나 최고의 미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