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감기에 걸렸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서울 마지막 공연 날에는 코피를 쏟았고, 하루에만 6개의 인터뷰를 소화한다. 데뷔 15년, 이미 무대에서는 다작배우로 소문난 엄기준이지만 영화라는 새로운 영역에 뛰어든 요즘, 그는 모든 것을 새로 경험하는 중이다. 21편의 뮤지컬, 4편의 연극, 8편의 드라마를 거쳐 2010년 그는 첫 번째 영화 <파괴된 사나이>를 만났다. 8년 전 유괴되었던 딸을 다시 구하기 위해 진창으로 뛰어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엄기준은 미소 속에 칼날을 숨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병철을 맡았다. 스크린 가득 흙과 돌이 담긴 그릇을 유괴한 아이에게 내미는 그의 눈빛은 무대와 TV 그 너머의 것이었다. 오늘도 무대와 TV, 스크린을 오가며 질주중인 엄기준을 만났다.
평소 인터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영화 홍보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겠다. 첫영화인만큼 이런 경험들이 처음일 텐데.
엄기준 : 그러게. 많다, 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예전에 <그들이 사는 세상>(이하 <그사세>) 제작발표회 때는 워낙 현빈, 송혜교에게 질문이 많이 몰려서 나나 (서)효림이, (최)다니엘은 조용히 앉아 있다 오고 그랬었는데……. 지금까지 15개의 인터뷰를 했고, 내일 또 6개를 한단다. 앞으로는 단역을 할까보다. (웃음) (오)광록이 형이나 (오)달수 형처럼.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한 지난번 인터뷰 이후 꼬박 1년 반 만에 첫영화 <파괴된 사나이>가 개봉한다.
엄기준 : <그사세>가 끝날 무렵 시나리오를 받고 하고 싶다는 의사표명을 했는데, 그 이후 <잘했군 잘했어>도 했고 연극 <밑바닥에서> 할 때까지도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그리고 <히어로>를 할 때쯤 정훈탁 대표님이 결정을 하셨다. 근데 대표님이 오케이 했다고 해서 감독님과 PD님이 오케이한건 아니었다. (웃음) 이후 뮤지컬 <살인마 잭>을 하면서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햇수로 2년이고, 1년 반을 꼬박 기다렸다.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나 했더니 내내 매달린 셈이었나 보다. (웃음) 이 작품을 그렇게까지 하고 싶었던 이유가 뭐였나.
엄기준 : 아직 나는 간택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웃음) 기본적으로 작품을 선택할 때의 기준이 언제나 캐릭터다. 특히 기존에 하지 않았던 캐릭터라면 더더욱 선택하는 편인데, <파괴된 사나이>의 병철이 그런 케이스였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레옹>의 게리 올드만 같은 악역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사세>의 손규호 같은 인물은 얄밉더라도 직접 경험할 수 있지만,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인 병철은 간접경험조차 어려운 캐릭터라서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들을 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병철의 캐릭터가 단편적이라 아쉬웠다. <그사세>의 손규호나 <히어로>의 강해성 등 그동안 엄기준이 맡아온 캐릭터들은 늘 비하인드가 있는 인물이었지 않았나.
엄기준 : 사실 예전엔 비하인드 없으면 안 하겠다고 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없어도 된다. 오히려 거기서 더 살리면 영화 전체로 봤을 때는 위험하다. 그 정도의 선이 훨씬 깔끔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비하인드는 관객의 몫이라고 봤다.
그래서인지 리스닝룸에서 홀로 클래식을 듣는 장면이 강렬했다. 특히 영화 내내 감정이 없어보이던 병철의 눈물 한 방울은 굉장히 묘했다.
엄기준 : 사이코패스가 정확히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병철이 사람을 죽이거나 영수(김명민)를 협박하거나 혜린(김소현)에게 돌을 먹일 때 모두 자제된 톤으로 연기했다. 그런데 리스닝룸에서는 병철 스스로도 복잡한 감정이었을 거다. 내가 만든 비하인드는 병철이 외딴 산골에서 부모와 함께 살다가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다 방해해서 죽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모까지 다 죽이고 나서 8년 만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췄으니 어땠겠나. 그 눈물은 거기서 나온 거다. 회한과 만족의 눈물.
영화촬영과 겹치는 바람에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이하 <몬테>) 연습 역시 쉽지 않았다. 특히 서울 마지막 공연 때 코피를 쏟았다던데.
엄기준 : 한 10년 만에 감기에 걸린 것 같다. 막공날 샤막 뒤에서 준비 중이었는데 공연 시작종이 울리고 나서 콧물이 나는 거다. 슥 훔쳤는데 빨갛더라. 주변에서 달려들어 계속 코 눌러주고 틀어막고 있고 그랬지 뭐. 노래 부르면서 코 들이마시며 공연하느라 진짜 힘들었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주로 소·중극장 공연들을 해왔는데, 2009년 <삼총사>를 기준으로 계속 대극장 공연을 하고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은 없었나.
엄기준 : <삼총사>, <살인마 잭>, <몬테크리스토>(이하 <몬테>) 세 작품을 했는데, 그 중 <몬테>가 제일 힘들었다. <삼총사> 달타냥의 경우엔 디테일한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편이라 그나마 잘 갔는데, <몬테>는 노래도 힘들고 디테일한 감정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 감정을 3층까지 보여주는 게 쉽지 않았다. 대극장에 맞게 표현해줘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하면 우선 내 집중이 깨져버린다. <살인마 잭>이 감정을 노래로 터뜨리는 반면, <몬테>는 대사와 리액션에 디테일한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몸짓만으로 표현하겠나. 그래서 <몬테>는 대극장에서 보여줄 수 있는 표현에 대한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어떤 감정이 그렇게도 힘들었나.
엄기준 : 사랑하는 여인이 나를 배신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 그래서 복수를 하겠다는 감정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애가 있다. 이미 그 순간부터는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거기다가 그 애가 내 아이라는 걸 아는 순간엔 뭔가에 크게 맞은 것 같이 멍해진다. 한순간 멍해진 다음엔 18년간 나를 기다려준 그 여자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고, 아이에 대한 벅찬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그 벅찬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더라. 그런 모든 감정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솔직히 <몬테>를 하면서 감정표현에 중심을 두자 해서 노래를 많이 포기하긴 했었다. 그래서인지 음악감독님도 감정은 정말 좋은데 가끔 박자는 맞춰 달라 하시더라. (웃음)
그런 감정표현의 강점 때문에 ‘엄기준은 앞자리가 진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은 곧 대극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엄기준 : 결국 감정표현은 사소한 눈빛과 표정, 대사톤 정도로 할 수 있는데 3층에선 대사톤 정도밖에 느끼지 못할 거다. 그렇다고 스크린을 설치할 수도 없고……. 그래도 좋겠다. 양 사이드에서 카메라 2대로 바스트 잡아서 보여주면 콩알만한 얼굴이 커 보이겠지. 아, 그럼 실수하는 거 다 뽀록나겠구나. (웃음)
그래서 사실 엄기준은 TV나 스크린에 맞는 배우였다. 하지만 무대에선 나름의 티켓파워를 가진 인물이었는데 다른 영역의 바닥부터 생활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엄기준 : 대극장보다는 소극장이 맞고, 카메라연기도 그래서 좀 더 수월했을 거다. 2007년 <김치 치즈 스마일> 할 때 매번 앵글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NG가 많이 났었다. <드라마시티>를 찍을 때만 해도 ENG카메라였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시트콤 셋트에 들어가면 원, 투, 쓰리 카메라가 있었다. 셋트 첫신부터 NG가 났고, 얘기를 듣고는 바로 고쳤다. 카메라감독님 중 연세가 제일 많으셨던 한 분께서 적응 진짜 빨리 한다고 하시더라. 안 잘리려고 열심히 했다. (웃음)
어떤 방식의 노력들을 했나.
엄기준 : 먼저 TV에 출연했던 (오)만석이 형이랑 우리 꼭 살아남자라는 말을 했었다. 실력이 있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니 우선 많이 봤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장에 무조건 가서 계속 보고,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이랑 친해지려고 했다. 특히 앵글 안에서 연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빨리 스스로 느껴야한다. 근데 배우는 그런 부분에서 빠를 수밖에 없다. 무디면 힘들다.
이번 영화를 통해 강한 악역을 했다. 욕심이 많아 앞으로도 더 해보고 싶은 캐릭터들이 많을 것 같다.
엄기준 : 영화는 밝은 로맨틱 코미디를 해보고 싶고, 드라마는 전문요원 같은 거 해보고 싶다. 약에 찌든 경찰이나 공직자 같은 것. 약과 관련된 것들을 해보고 싶다. (웃음)
너무나 비일상적인 캐릭터다.
엄기준 : 다양한 캐릭터를 하면 할수록 내 안에 뭔가가 쌓이는 것 같고, 그런 것들 덕분에 지금까지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상적인 연기도 필요한데 그런 연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먼저 강한 설정의 캐릭터로 단련하고 그 이후에 일상적인 연기를 해야 될 것 같다. 아직은 부족해서 당분간 그런 거 하면 연기라는 게 다 티난다. (웃음)
무대에서도 다작을 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동시에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엄기준 : 다작과 겹치기, 그건 방송에 가서도 마찬가지가 됐더라. (웃음) 나 스스로 쉬는 걸 못 견뎌서 계속 일을 해왔는데, 이제는 좀 쉬워야 할 것 같다. 특히 공연 같은 경우엔 연습량이 무대에서 그대로 보이는 장르라 연습 많이 해서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첫무대에 서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쉽지 않더라.
여전히 연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듯하다.
엄기준 : 연기만 잘 하면 모든 게 다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줄 아는 것도 연기뿐이다. 내가 지금 만약 연기를 못하게 된다? 그러면 자살할지도 모를 정도다.
그렇게 한 가지만 바라보면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지 않나.
엄기준 : 그래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유행어도 가요도 거의 모른다. 다른 드라마는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니저랑 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한다. (웃음)
서른다섯이 되면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올해로 서른다섯이 됐는데.
엄기준 : 올해 한다는데 안 불러 주더라. 내가 너무 어릴 때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시켜줘서 그런지 신춘수 대표님한테 나는 아직 어린아이인 것 같다. (웃음) 7월부터 9월까지는 연극 <클로저>를 한다. 탐나는 드라마가 하나 있어서 계속 시켜달라고 조르고 있고. (웃음) 드라마가 안 되면 그때는 쉴 거다. 바다도 수영도 좋아해서 짧게 쉬면 동해를 가고, 길게 쉬면 태국 한번 갔다 오려고 한다. 남해도 좋다던데 내가 운전해서 가야돼서 너무 멀면 안 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