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와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는 연출가 이보 반 호프에게 무의미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시간이다. 기원전 500년 소포클레스부터 400년 전의 셰익스피어, 100년 전의 헨리크 입센과 60년 전의 아서 밀러까지. 이보 반 호프는 오래된 희곡과 소설, 영화를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라는 무대 언어로 거침없이 바꾼다. 고전을 재해석하는 작가는 많다. 이보 반 호프는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주목받는다. 그에게 원작이 쓰여진 시대는 그야말로 배경에 불과하다. 이보 반 호프에게는 작품의 핵심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발견한, 시대를 불문하고 통용되는 이야기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줄리어스 시저의 사건은 지금의 정치드라마가 되고(<로마 비극>), 195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인간 본연의 불안(<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이어졌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이 흐려진 것은 당시에는 혁신이었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의 존재 때문이고, 그는 이를 과감히 삭제한다. 대신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가 겪어내는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현재의 무대와 객석을 잇는다. 인물과 삶의 다층적 면모에 주목하는 이보 반 호프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인물을 세심하게 구현해 관객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특히 이보 반 호프의 무대에는 사각의 링 같은 프레임만 있거나, 극단적인 스크린이 자리한다. 시공간이 모호한 무대에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고 집중도를 높이는 것은 무대 위에서 순간을 살아내는 배우들의 연기뿐이다. 이보 반 호프는 배우들에게 “텍스트의 X레이 촬영”이라는 말로 인물의 심연을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이들의 연기는 실시간으로 촬영·영사되어 연극성과 동시에 극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는 새로 연출을 맡은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21세기를 위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라는 말로 설명한다. 시간을 지움으로써 현재를 담는 연출가. 전 세계가 이보 반 호프를 기다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