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계획적 살인을 감행하는 연쇄살인마는 훌륭한 창작의 소재가 되곤 한다. 특히 <살인의 추억>과 같은 미해결사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콘텐츠이기도 하다. 지난 7월 22일부터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역시 영국에서 실제 일어난 연쇄살인마 ‘잭’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잭’이라 불리는 살인마는 1888년 가난한 노동자, 걸인, 창녀가 뒤섞인 하얀 예배당, 화이트채플에 처음 등장한다. 2개월에 걸쳐 다섯 명의 창녀를 죽였고, 그들의 장기 하나씩을 전리품으로 꺼내갔다.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계속되자 잭을 향한 세상의 호기심은 ‘춤추는 살인마’라는 쇼로도 이어졌다. 그런 거대한 범죄자이자 매력적인 엔터테이너였던 잭(신성우) 곁에는 세 남자가 있었다. 앤더슨(유준상) 형사는 힌트가 없는 범인을 쫓는데 지쳐 코카인에 의지했고, 그의 곁에서 기생하는 기자 먼로(김법래)는 잭을 이용해 “행복한 돈 냄새”를 맡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앤더슨과 먼로 앞에 외과의사 다니엘(안재욱)이 “제가 범인을 알고 있습니다”며 나타났다.
그 누구라도 바로 잭이 될 수 있다 8
체코에서 넘어온 <잭 더 리퍼>는 지난 2009년 11월 <살인마 잭>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초연되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잭은 세계 수많은 콘텐츠로 살아남아왔지만 한국의 뮤지컬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사실 <잭 더 리퍼>는 체코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 창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원작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잭이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달라졌고, 소극장 버전이었던 체코작품에 비해 한국작품은 대극장버전이었다. 그래서 2배에 달하는 새로운 곡과 안무가 추가됐다. 하지만 그 과정 안에서 무대와 캐릭터는 산만해졌고, 범죄를 그려냈지만 서스펜스와 스릴은 전무했다. 공연 종료 후 6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잭이 한국에서 부활했다. 이번 재공연에서는 초연 당시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던 과도한 코미디적 요소들이 대거 삭제됐고, 진지하고 타이트해진 극과 빨라진 템포로 관객의 몰입도를 높여 분명한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무대엔 전후좌우에서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와 유니버설 아트센터에 비해 높아진 천정에 조명으로 만들어낸 신비로운 영국의 하늘빛이 더해져 실제 살인현장에 온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많은 스릴러 콘텐츠들이 살인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21세기 연쇄살인의 인큐베이터와 다름없는 살인마를 꺼낸 <잭 더 리퍼>는 살인동기 외에도 다니엘, 앤더슨, 먼로 세 남자를 통해 살인을 대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잭은 세 남자에게 있어 대리만족의 존재이거나 평생직장의 필수조건, 좋은 돈벌이 수단으로 소비된다. 결국 <잭 더 리퍼>의 살인마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실재하는 셈이다. 그래서 잭에게는 존재감이 가장 중요하다. 이번 공연에 잭으로 합류한 신성우의 경우 지극히 비현실적인 비주얼과 성대를 잔뜩 눌러 만들어낸 록커의 목소리가 만나 살인마 근원의 공포를 살려내며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잭은 결국 잡히지 않았다. 과연 진짜 잭은 누구였을까. 뮤지컬 <잭 더 리퍼>는 7월 22일부터 8월 22일까지 성남아트센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