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팸어랏>, 아더왕과 깨알 유머 원정대 (텐아시아)

아더왕(정성화)의 충복 펫시(김호)가 어리둥절해하는 로빈 경(김재범)에게 말한다. “곧 적응될 거예요.” 그 말은 곧 뮤지컬 <스팸어랏>(Spamalot)이 관객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다수 사람에게 익숙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을 다루지만, 이 작품 속 전설은 유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더왕은 영웅의식에 젖어 있고, 함께하는 기사들은 찾아야 하는 성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본질을 한없이 흐릴 뿐이다. 그래서 <스팸어랏>의 유희를 즐기기 위한 제1원칙은 관객 스스로가 가진 편견과 통념을 깨는 것이다.
<스팸어랏>의 코미디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패러디다. 특히 이 패러디 정신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극 중 대사나 시각적인 효과를 비롯해 음악에까지 뻗어 나간다. 대극장 뮤지컬 특유의 웅장하고 중후한 오케스트라 선율에는 찌질한 대화체 가사와 욕지거리를 삽입해 반전을 주고, 행진곡과 찬송가 등에서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리듬을 차용해 패러디의 분위기를 더욱 공고히 해나간다. 또한, 공간 구석구석 숨겨놓은 다양한 퍼커션과 동물울음 소리 같은 음향효과는 각종 농기구를 이용해 음악을 만들어 낸 영화 <자토이치>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흥미롭다.
부조리에 더욱 공을 들여라 7
그리고 2막이 시작되면 <스팸어랏>의 백미, 뮤지컬 패러디가 기다리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패러디는 단계별 뮤지컬 학습효과까지 있다. <헤드윅>이나 <노트르담 드 파리>, <헤어스프레이>와 같이 눈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분장 패러디는 1단계. <시카고>에 낙관을 찍은 밥 포시의 안무 패러디는 2단계. 그리고 마지막은 <지킬앤하이드>의 ‘confrontation’(한 명의 배우가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며 부르는 노래)이나 <맨 오브 라만차>의 ‘거울의 기사’ 신과 같이 패러디 대상의 작품을 봐야만 알 수 있는 3단계. 그래서 <스팸어랏>은 지극히 마니아적인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1단계의 몇몇 작품만 캐치할 수 있는 일반관객과 3단계에서 그야말로 ‘빵’ 터지는 뮤지컬 팬들 사이의 외줄타기.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제작진이 선택할 수 있는 보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결국 즉각적인 반응을 위해 1차원적 개그를 급하게 수혈받는다. ‘생각대로 T’ CF나 소녀시대의 패러디, 사투리나 불어의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과 같은 개그. 하지만 그 반응은 즉각적이나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다.
한국적으로 수정된 2010 <스팸어랏>은 큰 스트레이트 없이 가벼운 잽으로 깨알 같은 웃음을 주고 선전 중이고, 그 점에 있어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매년 재공연 되며 더욱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원작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조리극’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어나가고, 살인을 해서라도 시체를 팔아 겨우 9펜스를 얻고자 하는 밑바닥 인생. 그리고 그 옆을 지나는 수도승 무리가 “병에 걸려 안 죽고 오래 살게 하소서”라며 근엄하게 기도하는 아이러니는 제법 씁쓸한 미소를 남긴다. 거기에 덧붙여 “부리는 종이 뭐 먹고 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냐”며 왕을 향해 일갈하는 진흙채집꾼 데니스(박인배)는 제법 속 시원하다. <스팸어랏>의 지독한 블랙코미디야말로 진한 페이소스를 남기며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성화, 박영규를 비롯하여 뮤지컬계 내로라하는 코믹의 대가들이 모인 <스팸어랏>은 10월 1일부터 2011년 1월 2일까지 한전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