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의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달콤한 과즙과 고소한 맛의 과육이 나온다. 그 어떤 인간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김호영이라는 배우를 감싸고 있는 여장남자, 동성애자 같은 캐릭터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껍질을 벗기면 유난히 예민하고 소심한 소년이, 장르를 나누지 않고 넘쳐나는 욕심을 지닌 청년이 넘쳐 나온다. 2002년 <렌트>의 “사랑스러움의 결정체” 여장남자 엔젤로 무대에 얼굴을 내민 이 해사한 배우가 등장한지 7년이다. 최근 김호영은 동성애가 정상인 ‘하트빌’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작품 <자나, 돈트!>에서 사랑을 연결해주는 매치메이커 자나 역을 맡아 공연 중이다. “2003년부터 너무 기다려온 작품이어서 그런지 요즘 주변사람들과 통화하면 목소리가 좋다고들 한다”며 6년을 꼬박 기다려온 작품출연에 대한 즐거움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자나, 돈트!>가 한국에서 공연되기만을 기다리며 들었던 OST에서 “어머니가 ‘호영이 네가 부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창법이나 목소리가 비슷했던” 오리지널 <자나, 돈트!>의 자나, 제이 로드리게스 역시 <렌트>에서 엔젤 역을 했었다. “뉴욕의 엔젤도 자나를 했는데, 한국의 엔젤이 자나를 못할 건 없지”라는 생각에 더더욱 욕심을 갖게 되었단다. 처음으로 본 오디션, 연습도중 너무 힘들어서 처음으로 화장실에서 울었던 기억, 없던 사인을 만들어 했던 첫 사인회, 녹음한 음악이 CD로 나오던 첫 경험, 사회생활의 첫 시작 등 “멋모르고 덤볐”지만 모든 것들의 처음을 경험하게 해준 <렌트>를 김호영은 No.1 뮤지컬로 선택했다.
뮤지컬 <렌트>는 1996년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었던 마약, 동성애, 에이즈를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였다. 파격적인 소재 외에도 이 작품 전반을 기획했던 36살의 조나단 라슨이 첫 공연을 하루 앞둔 날 사망함으로 인해 <렌트>의 주제 ‘No day, but today’를 더욱 부각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남경주-최정원 페어로 첫선을 보였고, 2009년 현재 여섯 번째 시즌을 맞아 공연 중이다.
김호영은 2002년 엔젤 역으로 처음 무대에 등장한 이후 2004년과 2007년 같은 역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정극만 해오던 연극학도였는데 뮤지컬은 너무나도 생소해서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았어요. 특히 저는 완전 신인이었는데 같이 작업했던 선배들은 기라성 같았거든요. 그래서 맹목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따라갔었”다고 첫 데뷔를 회상한다. 그가 맡은 엔젤은 <렌트>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어떤 인물들보다도 자신을 괴롭혔던 남자에게 “난 네가 죽어도 될 수 없는 남자 중의 남자이고, 네가 죽어도 만날 수 없는 여자 중의 여자야”라고 외칠 정도로 자기 확신이 강한 캐릭터다. 공연 초반 “엔젤이 죽기 전 링거를 꽂는 순간부터 과민성 장염이 생”길 정도로 극도의 긴장을 했던 그는 “남자, 여자라는 구분보다는 엔젤이라는 새로운 성으로 생각”하고 연기를 한 결과 이제 <렌트> 사상 가장 사랑스러운 엔젤로 기억되고 있다.
그동안 <렌트>의 엔젤, 연극 <이(爾)>의 공길, <바람의 나라>의 호동 왕자 등 “겉으로는 밝지만 비애를 감춘” 인물들을 주로 연기했던 그는 올해 ‘배우 김호영 알리기 작전’에 돌입할 계획이다. “관심도 있고, 잘 할수도 있을 것 같은” 예능프로그램들이나 시트콤, 그리고 “계속 ‘쟤는 뭘까’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사이코패스 같은 음지쪽에 있는 캐릭터도 해보고 싶다며 다양한 장르에 대한 호기심과 목마름을 말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혹은 알아가야하는 김호영은 어떤 모습인가. ‘오늘은 널 위해, 내일은 날 위해’라고 외치는 수호천사 일수도, 타인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종횡무진 하는 오지라퍼 일수도, 왕이 되고자하는 친구에게 칼을 겨누는 무사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한 가지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는 아직도 보여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I'll cover you’
김호영은 “천 번의 키스라는 표현이 추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며 ‘I'll cover you’를 <렌트> 베스트 넘버로 꼽았다. 이 곡은 강도로 인해 사랑이 싹튼 엔젤-콜린 커플을 위한 작품 속 유일한 커플러브테마. 특히 이 곡은 작품 초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을 그리지만, 엔젤이 죽은 후 엔젤이 부르던 부분을 콜린이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면서 슬픔을 배가시킨다. “<자나, 돈트!>도 동성애를 다루고 있지만, 엔젤과 콜린도 동성커플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관계의 사랑이든 사랑 때문에 같은 곡을 밝게도, 슬프게도 부를 수 있어요. 특별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사람을 웃게 할수도, 울게 할수도,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사랑은 정말 위대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