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뮤지컬인가, <뮤직뱅크>인가. 놀랍게도 이 문장은 뮤지컬 <킹 아더>에 대한 관람평이다. <킹 아더>에는 현대적인 음악이 있고, 비보이부터 발레까지 각종 장르의 춤이 있으며, 규모로 압도하는 LED 패널에서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영상이 쏟아진다. <킹 아더>의 요소들은 대극장 뮤지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요소들이 하나의 장면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서로 다른 곡들이 통일된 흐름 없이 나열된다는 점이 <킹 아더>를 <뮤직뱅크>와 같은 음악 프로그램으로 느끼게 한다.
<킹 아더>가 이토록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작품이 오리지널과 의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킹 아더>는 2015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프랑스 뮤지컬이다. 다수의 프랑스 뮤지컬이 그러하듯, <킹 아더> 역시 싱어와 댄서로 분리된 퍼포머들은 높은 퀄리티의 음악과 움직임을 보여준다. 프랑스 뮤지컬은 리얼한 상황의 재현보다는 캐릭터들의 감정이나 성격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이를 체육관 규모의 큰 극장에서 대규모 물량공세로 펼쳐낸다. 이러한 제작 환경 속에서 창작자와 관객 모두가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쇼임을 인지한다. 때문에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연성이 아닌 매력이다. 특히 아더왕의 전설은 다양한 작품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킹 아더>는 드래곤이나 주술 같은 판타지적인 설정을 강조하고, 때문에 명확한 서사와 리얼리티를 선호하는 한국 관객에게는 더욱 이질적이다.
<킹 아더>의 한국 창작자들이 개연성에 중심을 두고 작품을 각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도가 달라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부드럽게 연결해 줄만 한 서브텍스트다. 그런데 아더의 출생을 둘러싼 <킹 아더>의 이야기는 관객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아더의 탄생은 ‘사랑’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강간’이 팩트이며, 아버지가 다른 모르간은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꿈꾸고, 아더의 아내인 귀네비어는 불륜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더를 제외한 캐릭터들은 입체적인 레이어 없이 단 하나의 감정만을 내내 외칠 뿐이니 관객의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다. 완벽하게 이야기를 바꿀 수 없는 이상 개연성을 위한 작업은 최소화 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오리지널이 갖고 있던 매력은 반감되고, 납득할 수준의 이야기 전개도 만들어내지 못해 애매한 위치에서 멈춘다.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와 서사의 결합이 유기적인 <노트르담 드 파리> 정도를 제외하면 이러한 문제는 프랑스 뮤지컬이 국내에 소개될 때마다 고질적으로 발견된다. 한국에서 공연되는 이상 한국 관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작품과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작품이 가진 고유의 매력을 고려하지 않은 한국화 작업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 창작진의 뚝심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고, 주제를 뒷받침 해줄 다양한 요소들의 제 위치를 찾아주는 것. <킹 아더>는 이것이 가장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임을 온 몸으로 증명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