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준수, 박건형, 임태경, 박은태. 2010년 새해와 함께 시작된 뮤지컬 <모차르트!>(Das Musical Mozart!)에는 4명의 볼프강 모차르트가 존재한다. 각각의 생김새만큼이나 그들이 표현하는 볼프강의 모습도 다르지만 단 하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만은 모두가 같다. 자식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했던, 삐뚤어진 애정을 가진 볼프강의 아버지는 16년 차 뮤지컬배우 서범석을 만나 더욱 풍성해졌다. ‘존재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무대에서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배우. 94년 앙상블로 데뷔해 어느 순간 존경받는 선배의 위치에 오른 ‘범사마’ 서범석을 만났다.
<모차르트!>가 연일 화제 속에서 공연되고 있다. 최근엔 콜로레도 역의 민영기의 결혼소식으로 후끈 달아올랐는데, 축가는 안 부르나. (웃음)
서범석 : <모차르트!>의 넘버를 불러줘야겠다. “왜 허락했나~ 왜 허락했지” 으하하하하.
한동안 <노트르담 드 파리>(이하 <노담>)와 <라디오 스타>에 계속 출연해왔고, <남한산성>은 신작이라고 하기엔 역할이 너무 작았다. 그런 의미에서 <모차르트!>는 오래간만의 신작인데, 이 작품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서범석 : 처음 <모차르트!> 제의를 받았을 때 배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나도 영화 <아마데우스>를 떠올렸고, 2인자 콤플렉스를 가진 살리에르 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뮤지컬 <모차르트!>에는 그 역이 등장하지 않았다. 제작사 쪽에서는 레오폴트가 이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니 중심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리고나서 대본을 봤는데, 인물이 만만치 않았다.
단순한 모차르트의 아버지로 전락할 수 있는 레오폴트가 서범석을 만나 다층적 인물이 된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인물에 접근했나.
서범석 : 레오폴트는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자식의 사랑보다도 레오폴트 본인의 욕망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로 인해 아들이 천재가 되어가는 느낌들을 표현해야 됐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특히 관객들과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소통하느냐도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애정은 있지만 무뚝뚝한 한국의 아버지와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레오폴트를 통해 비춰지면 더욱 한국 관객들이 이입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한국적으로, 그 바짓바람과 치맛바람 속에도 굉장한 애정과 욕심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모차르트하면 많은 사람이 영화 <아마데우스>를 연상한다. 그래서 그런지 살리에르가 안 나오고, 아버지와 대주교가 모차르트의 대척점에 서면서 관객들이 많이 당황하는 것 같았다.
서범석 :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천재로서의 아마데와 그를 벗어나려고 하는 볼프강, 아들의 천재성을 구속하고 외부의 질투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와 그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볼프강의 관계. 그런 관계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래서 모차르트가 아버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모차르트가 연기하기도,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기도 어렵다. 실제 모차르트 자체가 하나님 다음은 아버지라 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인물이다. 물론 극의 내용처럼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 했지만 그 동기조차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 화두를 관객들이 아직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노래로 진행되는 송쓰루 형식 때문이지 않을까.
서범석 : 기본적으로 노래도 많이 어렵고, 초연이라서 번역 등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거다. 노래로 진행되는 만큼 이야기와 감정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부분도 있었을 거고. 몇 번 봐야지 아는 것 같다. (웃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젊은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나이 드신 분들은 자식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모차르트!>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관객들이 느꼈으면 하는데, “모차르트 멋있다!”라는 얘기만 나오면 너무 단편적이지 않겠나. (웃음)
오스트리아 뮤지컬이라서 그런지 <모차르트!>의 노래가 굉장히 어려워 보인다. 특히 뮤지컬은 노래에 감정을 싣는 장르인데, 그 부분을 배우들도 관객들도 어려워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쉽진 않았을 텐데.
서범석 : <모차르트!>는 까다로우면서도 퀄리티 있는 음악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박자가 많이 어려운데, 워낙 박치이기도 해서 (웃음)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 음악이 어렵고도 좋다. 쉽고 좋으면 참- 좋을 텐데. 뮤지컬을 앙상블부터 시작해서 합창은 잘해도 노래 한 소절, 한 곡을 책임진다는 게 참 많이 어려웠다. 가사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하고, 감정을 생각하고 연습하다 보니 이 노래 안에서 어떤 걸 보여줘야겠다라는 목표가 서고, 무대에서 하다 보니 다른 배우들에 비해 그런 힘들은 길러진 것 같다. 지금은 노래하는 것에 있어서는 전혀 겁나는 게 없다.
그렇다면 겁나는 건 뭔가.
서범석 : 노래로 인물을 풀어내는 것은 그동안 많이 해 와서 특별히 어렵지 않지만, 이제는 대사를 어떻게 더 정확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대사를 하면서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 와중에서 뭐가 더 정확한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한다. 사실 첫 공연때 그런 분석이 완전하게 다 끝나서 고민 없이 표현되는 시점이 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에 비해 그 인물이 되는 소위 ‘로딩’ 시간이 짧은 편이고, 그게 곧 서범석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지 않나.
서범석 : 뮤지컬에서는 짧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드라마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전날, 하다못해 방금 나온 대본으로도 대단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지 않나. 김갑수 선배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그 배역의 역사가 단 한마디로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너무 경이롭다. 나도 그런 경지에 올랐으면 좋겠다.
연기나 성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대학에서 극회생활을 했다 들었다. 1994년에 뮤지컬 데뷔를 했는데, 지금과 같은 붐이 일지도 않았던 때 연극이나 영화가 아닌 뮤지컬을 선택한 이유는 뭐였나.
서범석 : 뮤지컬을 하면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가지각색의 경험을 하면서 말 그대로 탤런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웃음) 그래서 뮤지컬을 먼저 시작하게 된 거다. 그런데 이렇게 분야별로 나뉠 줄은 몰랐다. (웃음)
뮤지컬배우들이 연기에 대한 갈망으로 연극에, 노래에 대한 갈망으로 앨범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특별한 외도 없이 계속 뮤지컬을 해오는 것 같다.
서범석 : 드라마, 영화, 연극들을 잠깐씩 하긴 했었다. 그리고 어릴 때는 가수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이젠 내 노래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다. “노래방에서 서범석 노래 한번 불러야지” 할 수 있는 것. 정말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뮤지컬 연기뿐 아니라 정말로 장르를 넘나드는 그런 배우가 되는 게 최종목표다.
오랫동안 창작을 고집한 것도 있고, <라디오 스타>와 <노담> 같은 작품은 초연부터 계속해서 출연하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뚝심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작품을 해오면서 슬럼프는 없었나.
서범석 : 현재의 나에 대한 숙제들이 너무 많아서 슬럼프는 못 느꼈었다. 그런데 좀 있다가 올 것 같다. 뮤지컬을 통해서 정형화된 인물과 노래를 하고 있는데 좀 다른 방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볼 거다. 그러면서 한 번의 슬럼프가 오지 않을까.
새로운 시도라면.
서범석 : 정말 막 해보는 거다. 사실 무대 위에서의 연기는 약속인데, 아무 생각 없이 정말로 막 해보는 거다. 성격상 힘들 것 같은데, 그런 틀을 깨는 작업을 경험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슬럼프가 찾아오겠지.
탄탄하게 앙상블부터 시작해 온 것과 달리 요즘은 연예인들이 뮤지컬에 진출하기도 하고, 배우들이 쉽게 주연을 맡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서범석 : <모차르트!>에 시아준수가 와있는데, 뮤지컬은 처음이지만 그가 가수가 되고자 트레이닝 받았던 시간은 우리 앙상블들보다 더 길 것 같다. 젊은 친구들이 주연을 맡는 경우도 그 친구들이 남모르게 준비한 시간이 길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뒤에서 연습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게 이 장르다. 최소한 서른이 되어야 인정받을 것 같은데, 그전에 된 친구들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시간적인 투자를 많이 했을 거다. 그 일에 얼마나 자신의 시간을 투자했느냐가 관건인 거다.
뮤지컬시장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비해 많이 변화했다. 어떤 부분에서 격세지감을 느끼나.
서범석 : 격세지감은 후배들이 받는 개런티를 보면 느낀다. (웃음) 나도 조금만 늦게 태어났으면 좋은 차 금방 샀겠구나 싶고. (웃음) 예전에 비해 많은 사람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고, 뮤지컬이 화제가 되어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공연되는 작품들도 참 많다. 그런 부분에서 변화를 느끼는 것 같다.
어느새 존경받는 선배의 위치가 되었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들도 있을 것 같다.
서범석 : 후배들이 조금 좋아하는 (웃음) 선배가 되었다. 나는 연습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연습시간에 너무 일찍 가고 끝나고도 집에 안 가고 연습만 했다. 그래서 술자리도 별로 안 갔고, 심지어는 동료끼리 대화하는 법도 잊어버릴 정도로 연습했다. 후배들에게는 좀 더 자유로운 일상을 보내라고 조언한다. 사생활 속에서 무대의 느낌이 나오는 거니까. <명성황후> 뉴욕 공연을 가서도 남들이 브로드웨이 공연 보러 다닐 때 난 “공연하러 온 사람이니까 공연 컨디션 조절해야 된다”면서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고지식했다. 뉴욕에 가기도 쉽지 않은데, 간 김에 그쪽 뮤지컬들도 좀 보고 해야 했는데 참 후회가 된다. 그런 나만의 틀들이 도움도 됐겠지만, 연기자로서 방해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노담>의 혼란에 빠진 신부 프롤로, <미스터 마우스>의 정신지체를 앓는 인후, <파이란>의 건달 강재 등 그동안 뮤지컬에서 맡았던 캐릭터들이 순탄치 않았다. 스스로도 몰입을 심하게 하는 편이라고 했는데,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서범석 : 목소리에 날카로운 면과 남을 윽박지르는 힘이 있어서 그런 캐릭터들에 나를 찾는 것 같다. <파이란>을 할 때는 욕을 좀 많이 했었다. 약간 범생이 이미지가 있는데 (웃음) 내 입에서 욕이 나오니까 애들이 깜짝깜짝 놀래기도 한다. 레오폴트 역시 신경질적인 부분들이 있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평상시에도 배역이 묻어나온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해왔는데 가장 아쉬웠던 작품과 만족스러운 작품은 무엇인가.
서범석 : <미스터 마우스>는 만족스럽게 해서 다시 하기 겁나는 작품이고, <노담>의 프롤로도 아쉬움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아쉬움 없는 작품들은 사랑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2004년도에 했던 <지킬앤하이드>는 많이 아쉽다. 연습을 많이 못 해서 나를 다 보여주지 못한 것 같고, 감을 잡았을 때는 이미 공연이 끝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때 겹치기가 좀 있었는데, 그러면서 정작 꿈의 배역인 지킬을 제대로 못 해냈다. 아쉬운데 지금은 나이 먹어서 시켜주지도 않고. (웃음) 요즘 뮤지컬들은 젊은 배우를 선호한다. 내 나이가 아직 아버지 역을 할 나이는 아닌데 아버지 하고 있지 않나. (웃음)
캐릭터와 배우의 나이가 비슷할수록 작품이 탄탄해진다고 보는 편인데, 우리나라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들지 않나.
서범석 : 축소됐다. 이제 그만 둬야 된다. (웃음) 분명히 그렇다.
매번 얘기하는 <헤드윅> 해야 되지 않겠나. (웃음)
서범석 : <헤드윅>도 <헤드윅>이지만, <맨 오브 라만차>를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 어느 순간 돈키호테의 핵심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에게 고지식하고 외골수적인 느낌이 있어서 하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노래, 작품이 얘기하는 사상과 정신들이 너무 맘에 든다. 기존에 했던 배우들과는 좀 더 다른 해석과 표현이 가능할 것 같다.
<모차르트!>가 21일을 끝으로 서울공연이 마무리된다. 이 작품으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
서범석 : 같이 출연한 동료들도 모두 베테랑이었고, 노래도 너무 좋았다. 하나가 돼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런 와중에 관객들도 많이 사랑해주셨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그동안의 작품들은 내가 이끌어가는 것들이 많았는데, <모차르트!>는 볼프강을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도 레오폴트를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4명의 모차르트가 그들의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서포팅하고 밀어줬다. 그러면서 배려심을 배운 것 같다. 속 썩이는 아들들, 나한테 잘해야 된다. (웃음)
작년 한 해 SBS <야심만만 2>, KBS <샴페인> 등에 출연하면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서범석만의 독특한 발성법 “후~잉”을 예능프로그램에서 더 볼 수 있을까.
서범석 : “뮤지컬배우가 웃긴다” 하면 좋은데, “저 웃긴 사람이 뮤지컬도 한데” 라는 얘기가 들리는 건 아닌 것 같다. 인지도엔 많은 도움이 됐지만 더 가면 위험할 것 같다. 지금 여러 뮤지컬 작품 얘기가 있지만 일단 <모차르트!> 지방 공연까지 잘 끝내고, 기회가 되면 영화를 할까 생각 중이다. 올해는 또 다른 장르에 욕심을 부려볼 생각이다. 이젠 노래 연기 말고 연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