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태의 캐릭터 해석력, Like
도리안 그레이(김준수)가 곱씹는 말을 떠올려보자.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감각.” 헨리(박은태)의 절친한 친구 배질(최재웅)은 그의 논리를 “궤변”이라 말하고, 관객 역시 “삶의 환희를 즐기라”는 달콤하지만 위험한 유혹에 쉽게 마음을 열기 어렵다.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도리안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헨리의 논리를 증명하는 데 쓰고, 관객도 자기 안에 존재하는 헨리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관념적인 대사와 ‘영혼을 바쳐 생명력을 얻는다’는 추상적인 설정, 화려하지만 어딘지 음울한 느낌의 음악과 무대에도 이야기가 구체성을 띄게 되는 데는 박은태의 공이 크다. 그는 낮은 듯 부드러운 음성과 차분한 속삭임으로 누구에게나 내제되어 있는 본능을 깨우고, 따뜻한 눈빛과 절제된 배려로 불안함에 흔들리는 이들을 안심시키고야 만다. 꼿꼿한 자세와 단호한 어조로 학자로서의 냉정한 이성과 호기심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것도 물론이다. 캐릭터 구축을 위해 박은태가 사용하는 것은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확한 딕션, 다양한 발성, 넓은 음역대. 그러나 선을 향해 달리는 인물을 주로 맡았던 그가 같은 방식으로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전복의 효과는 상상보다 훨씬 크다. 1막이 전복으로 매력적인 악인을 탄생시켰다면, 도리안의 타락을 지켜보며 자신이 주장해왔던 논리의 허점을 인정하고 양심을 회복해가는 2막은 진정한 의미의 “영혼과 육체의 완벽한 조화”라는 작품의 주제까지도 선명하게 한다. 각성의 순간이 뚜렷하게 보이는 대신 그라데이션 된 듯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인물을 통해 편안함까지 느끼게 되면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인간을 향한 헨리의 논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질적인 ‘Against Nature’, Dislike
<도리안 그레이>는 새하얀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안무로부터 시작된다. 그 사이를 오가는 배질은 그리스 신화 속 아도니스의 현신을 도리안에게서 본다. 작품은 모두가 탐내는 매혹적인 젊음과 팔딱이는 생기를 땀 흘리는 육체의 안무로 표현해낸다. 이 노선을 가능케 한 것은 노래만큼 춤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이는 김준수. 그는 쇼팽의 ‘녹턴’에 맞춰 등장하는 장면부터 초상화 속 자신과 대치하며 부르는 ‘넌 누구’까지 독무와 군무를 소화해내며 “잡힐 듯 잡힐 수 없는 상상 속의 존재” 같은 도리안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현대무용이 가미된 안무는 독특하고, 실키한 소재의 의상들은 육체의 선을 아름답게 부각시키며 안무에 힘을 싣는다. 특히 도리안이 쾌락과 죄책감 사이에서 분투하는 1막 엔딩 ‘Against Nature’의 경우 하나의 개별 퍼포먼스로 느껴질 만큼 완성도도 높다. 그러나 ‘개별 퍼포먼스’라는 말은 전체 구성 안에서 다소 이질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대 좌우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넓게 쓰는 콘서트형 동선과 배우들 사이에 묘하게 다른 안무의 톤에 소리가 뭉개져 들릴 수밖에 없는 합창이 더해지자 ‘Against Nature’는 넘치는 에너지와는 별개로 감정의 모호함만을 남긴 채 마무리된다. 새로운 시도가 반가우면서도 아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