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뮤지컬 <그리스>에서였다. “너만 생각해”라고 외치던 ‘샌디’에 비해 “절대로 질 수 없어”라며 사랑에 있어서도 당당했던 리조의 모습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캐릭터와 함께 배우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왠지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져 울고 있을 때 그저 툭하고 어깨를 쳐주고 가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은 모습. 그것이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그 이후로도 “순수하고 고결한 쪽보다는 붉은색을 띄는” <지킬앤하이드>의 루시, <헤드윅>의 이츠학, <록키호러쇼>의 마젠타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운이 좋아 그런 독특한 역할들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몸을 사리지만, 그 캐릭터들에게서 이영미 뺀 다른 캐스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그녀, 그래서 그녀가 선택하는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궁금했다. “제가 하는 작품이 아니면 뮤지컬을 잘 몰라요. 그리고 역할이 좋은 거랑 작품이 좋은 거랑 제가 봤을 때 재밌던 작품은 또 다르잖아요.”라며 한참을 생각한 후 그녀는 독립적인 여성캐릭터들이 돋보인 <밴디트>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밴디트>는 록음악을 통해 자유와 분노를 발산하던 여죄수 4명의 탈옥기를 바탕으로 1997년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다. 이후 2006년 동명영화를 원작으로 한국에서 뮤지컬로 제작되었으며, 2007년에는 좀 더 한국현실에 맞게 각색해 <밴디트-또 다른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이영미는 극중 ‘밴디트’의 리더이자 화도 잘내지만 그만큼 눈물도 많던 폭력전과자 ‘루나/영서’ 역으로 2006년 초연부터 2008년 4번째 공연까지 모두 출연하였다. “공연을 하기 전, <밴디트> DVD를 팬에게서 받았던 적이 있어요. 영화를 보면서 ‘루나, 저건 내꺼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음악을 통해 자유를 찾는 여정 자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죠.” 극단적으로 말해 “공주 아니면 창녀, 아니면 공주네 엄마”라고 할 정도로 여성캐릭터가 단조로운 뮤지컬에서 <밴디트>는 다른 작품에 비해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고 각자의 사연이 있는 캐릭터들로 이루어져 더 좋았다며 덧붙인다.
그렇지만 <밴디트>는 그녀에게 기쁨도, 슬픔도 안겨주었던 작품이다. “저를 제외하고 초연배우들이 빠졌던 2006년 앵콜때는 연습 15일 만에 무대를 올렸어요. 드러머 엠마 역을 맡았던 배우는 무리해서였는지 공연 중간 급성간염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었어요. 마지막 공연도 하지 못한 채 작품을 접어야했고, 짐을 챙겨서 문병을 갔는데 연출, 배우 모두가 울었어요. 슬프더라구요.” 그렇게 아픈 기억을 꺼내다가도 ‘간수와 싸우는 장면을 연습하면서 남자배우의 티셔츠를 다 늘어놓았던 기억’이나 ‘허술했던 무대 위를 뛰어다니느라 고소공포증마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어느새 하하하 하고 화통하게 웃고야 만다.
최근 오만석 연출의 뮤지컬 <즐거운 인생>에서 삶의 의지마저 사라져버린 선영 역을 맡았던 이영미는 1월 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앨범을 한 장 발표했다. “뮤지컬을 하면 할수록 노래도, 연기도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약간의 슬럼프도 있었어요. 연기에 대해 돌파구를 찾고 싶은 사람들은 연극이나 영화를 찾게 되는데, 저 같은 경우엔 음악에 대한 갈증이 생기더라구요.” 대학가요제 출신, 예명으로 냈던 앨범 한 장 등 부가적인 정보가 아니더라도 무대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이유다. 팬들에게 늘 ‘여왕님’이라고 불리지만 그녀가 만드는 곡들은 언제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특히 ‘SHE’라는 제목을 붙인 이번 앨범에서는 모니카 벨루치를 좋아해 영화 <라빠르망>이나 <말레나> 속 그녀들의 심정이 되어 만든 곡들도 있다고. 앨범발매로 당분간 ‘여왕님’의 뮤지컬 무대는 보기 어렵겠지만, 사랑과 이별을 담담한 톤으로 부르는 ‘이영미’를 또 다른 무대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는 그녀가 당신 곁에 앉아 살뜰히 전하는 따스한 위로를 들을 시간이다.
베스트넘버
‘Another sad song’
“<밴디트>는 아무래도 그거죠. ‘Another sad song’.” 탈옥한 ‘밴디트’ 멤버들이 따스한 햇살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여유를 즐길 때 루나 혼자 부르는 솔로곡이다. 다른 곡들이 록스타일로 강한 분노를 표출하는 반면, 이 곡은 어쿠스틱 기타 한 대와 쓸쓸한 루나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졌다. 누군가는 잠을 청하고, 누군가는 들판을 뛰고 있는 사이 “센티멘털하네”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음을 적시는 목소리. “처음은 자유로움으로 시작하는데 결국 쓸쓸한, 묘한 느낌을 주는 곡이에요. 그런데 3번째 공연에서는 좀 더 외로움이 부각되었었던 것 같아요” 2007년 공연에서 유난히 그 곡을 부를 때마다 관객들의 훌쩍거림이 도드라졌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그녀는 애잔한 목소리로 우리의 외로움을, 아픔을, 슬픔을 함께 토닥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