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쭉, 멀리 고깔 하나가 보였다.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파란 고깔모자. 디즈니를 대표하는 파란 고깔모자는 1940년 제작된 <판타지아>에 처음 등장했고, 이 대표성을 이용한 공간은 1995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설립될 당시 회장의 사무실로 쓰였다. ‘디즈니’라는 이름에서 많은 이들이 영화에 나오는 성을 상상한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직접’ 그려내는 곳은 예상보다 더 소박하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고깔이 전부인 이곳이 미키 마우스와 <인어공주>, <알라딘>과 <겨울왕국>을 만든, 성의 펄떡이는 심장,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LA 할리우드 버뱅크에 위치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드림웍스,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와 인접해있다. 그래서인지 디즈니로 향하는 길은 답답한 현실을 벗어던지고 꿈을 찾는 자들의 노란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익숙한 포스터들을 지나치며 드디어 디즈니에 입성한다. 이곳은 파란 고깔모자에서도 알 수 있듯, 100여 년 전 월트 디즈니가 창조한 미키 마우스가 외부인을 가장 먼저 반긴다. 애니메이터들의 작업 공간에는 물론, 건물 울타리부터 주유소의 입간판, 물탱크에 이르기까지 미키 마우스는 다양한 공간을 누비며 영역표시를 한다. 게다가 크기와 모양까지 모두 제각각이라 스튜디오에 숨은 미키 마우스를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활용가치는 충분하다. 최근 개봉한 <겨울왕국>에는 <말을 잡아라!>라는 짧은 애니메이션이 등장한다. 2D와 3D, 흑백과 컬러를 넘나드는 이 단편처럼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도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며 역사를 만든다. 애니메이션이나 각종 MD와 같은 완성품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재직 중인 한 애니메이터는 “그림 한 장 한 장을 모두 자료로 정리해놓기 때문에 언제든 인트라넷을 이용해 그림 자료를 볼 수 있어 공부하기 좋은 회사”로 디즈니를 정의하기도 했다. 과정과 결과 모두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디즈니가 살아남은 방법이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2층으로 가는 계단 옆에는 피노키오에게 숨을 불어넣은 제페토의 원화가 걸려있고, 작업공간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입체감이 살아있는 디즈니의 최신작이 길게 전시되어 있다. 한쪽은 백설공주로, 다른 한쪽은 일곱 난쟁이로 구분한 남녀 화장실에서는 디즈니의 작은 위트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디즈니의 오래된 역사와 별개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더욱 돋보인 점은 조직의 시스템에 있었다. 환상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 뿐 아니라 구성원들에게도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준다. 디즈니에서 만난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은 “나이가 지긋해져도 개인 작업공간에서 와인 한 잔 하면서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 아티스트들을 보면서 하고 싶은 것을 여전히 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럽다”고 말한다. 2012년 방문 당시 스튜디오에서는 <주먹왕 랄프> 제작을 위해 실제 만든 8비트 게임기 ‘다고쳐 펠릭스’을 비롯한 다양한 오락기로 가득한 게임센터와 블록처럼 이어진 크리에이터들의 개인 작업공간이 눈에 띄었다. 특히 크리에이터들의 색을 가득 담은 블록들에게서는 각자의 세계가 뿜어져 나왔다.
이런 디즈니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자체동력을 만들어내고, 이는 수없이 쪼개진 전문분야 인력들의 협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환상을 믿게끔 하는 “현실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다. 물체의 움직임을 위해 물리적 측정치를 이용하고, 작품 속 건물을 위해 건축자재를 참고하거나 전투기 한 대를 위해 공군기지를 찾아 전투기 내부를 직접 확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방문 당시 한참 작업 중이던 <겨울왕국>의 배경을 위한 수천그루의 실제 나무 사진이나 눈결정 등도 스튜디오 내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미지였다. 애니메이터들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를 위해 사방이 거울로 된 공간에서 직접 연기를 하며 표정과 움직임을 담아낸다. 눈 위를 걷는 지친 안나의 걸음걸이나 물 흐르듯 자연스레 움직이는 엘사의 옷자락 같은 <겨울왕국>의 디테일은 모두 이 과정 위에서 태어났다.
무형의 판타지를 진짜로 만들어내는 마법은 결국 사람의 손에서 피어난다. 수평적인 관계와 기술이 중요해진 시점에서도 여전히 중시되는 예술성, 나이와 경력을 뛰어넘어 계속되는 지속가능성. 이 모든 것은 디즈니를 잠깐 엿본 외부인의 질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디즈니가 환상을 믿게 만들어버린 것처럼,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이것의 현실을 보여준다. “Here you leave today and enter the world of yesterday, tomorrow and fantasy.” 디즈니랜드 입구에 쓰여진 글귀처럼, 오늘을 버리고 어제와 미래 그리고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여전히 늙지 않는 법은 영원히 디즈니와 함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