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얼마나 많은 성차별이 사회 곳곳에 있고, 문화와 교육을 통해 어떻게 재생산되며, 이러한 구조가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억압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페미니즘의 정석’과도 같은 원작이 10월, 연극으로 소개된다. 솔직함을 무기로 세상의 문제를 들추는 데 주저함이 없는 김수정 연출가와 극단 신세계를 통해서다. 도망칠 곳은 없다.
70년대 노르웨이에서 쓰인 원작을 2019년의 한국으로 옮겨오면서 일정 부분의 각색이 있을 것 같다.
원작은 1부에서 차별을, 2부에서 차이를 이야기한다. 2부의 시도와 담론들이 당시에는 맞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소설이 발표된 때보다 많이 진전해서 2018년부터 2019년의 한국 사회를 상상할 수 있도록 각색했다. 그리고 번역서가 갖는 한계가 있어 원작의 큰 틀을 흔들지 않은 범위 안에서 용어들을 수정했다. 친절한 설명이 가능한 소설과 달리 공연은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이 듣자마자 알아채야 한다. 1차적인 방식이어서 당황스러운 용어들이 많을 거다.
구체적으로 어떤 단어들이 수정됐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기를 가리는 용도로 남성이 착용하는 ‘페호’다. 작품의 메인 상징이라 작년 워크숍 때부터 1년 가까이 고민했다. 최종적으로 ‘브라’라는 단어를 이용해 고쳤다. 어원을 찾아보니 과거 유럽에서 남자들이 갑옷으로 쓰던 게 브래지어라고 하더라. 남성의 물건이 여성에게 넘어오면서 옭아매는 요소가 됐고,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브라’라는 용어로 변화했다. ‘메이드맨의 무도회’ 같은 단어는 ‘소년들의 무도회’가 됐고.
페호를 비롯해서 성별이 뒤바뀐 세계관 안에서 시각화된 의상에 대한 고민도 있겠다.
이 작품이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공연된 적이 거의 없어서 우리 작업이 처음으로 시도되는 본격적인 시각화다. 너무 어려워서 작가한테 직접 그려달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웃음) 기준으로 세운 것은 ‘포르노그래피로 전시하지 않는다’였다. 예를 들어 의상 위에 페호를 걸치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계속 페호만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페호 자체를 드러내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숨기되 부분이 노출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인물들의 의상도 마찬가지다. 여성 배우가 보통의 남성이 입는 의상을, 남성 배우가 보통의 여성이 입는 의상을 입는다.
서로가 상대를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지 않을까.
의상뿐 아니라 연기술에서도 여러 시도를 해봤다. 요즘 많이 하는 젠더 프리로도 해봤는데, 작품이 뭘 얘기하고자 하는지가 읽히지 않더라. 원작 자체가 편이 정확하게 나눠져 있기 때문이었다. 작년 워크숍 때만 해도 희화화의 위험성을 최대한 배제하겠다고 했지만, 올해는 정확하다. 희화화가 맞다. 여성성도 남성성도 모두 희화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옷을 바꿔 입고 나니까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 그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게 보이더라. 또 하나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중 하나가 일상에 내제한 폭력이다. 화목함과 즐거움을 가장한 폭력이 1부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데, 만약 이것을 지정된 성별로 보여주면 어머니, 아버지, 자식의 드라마로 읽힌다. 고정된 성 역할과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질문과 환기를 위해서라도 더 극명하게 젠더 크로스를 해야 한다.
하지만 미러링이 갖는 한계도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1부에서 얘기하는 차별은 겉으로 보면 성차별이 맞다. 그런데 그것은 진입 통로고, 이 세계관에 익숙해져야 2부의 차이로 연결이 가능해진다.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건 계급차별에 더 가까웠다. 올모스 저택에서 일하는 콘필드라는 나이 든 여성이 있다. 소설에는 짧게 나오는데, 성별과 계급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이 인물을 작품 전체에 배치했다. 시각적으로, 서사적으로 너무 전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신 쉽지 않은 이미지들로 관객이 당황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이 우리 엄마 아빠나 젠더 감수성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번에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수준에 맞게 차별을 확인하고 차이를 인식하는 정도로 많은 것을 결정했다.
그동안 공연한 작품들이 날 것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이갈리아의 딸들>도 그 연장선에 있을 텐데. 이러한 표현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동료들이랑 처음 모였을 때 모두가 분노로 거칠어진 상태였다. 아는 게 없으니까 아는 만큼 얘기하자는 목표가 생겼고, 거기서 중요한 것이 솔직함이었다. 거친 방식과 폭력의 기준에 관해서 여러 얘기가 오갔지만, 불편함을 안 보는 것이 더 폭력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이런 표현 방식에 불쾌감을 표하는 이들도 많았고 그 말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우리의 기호고 성향이다.
폭력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단체 차원의 지침이 있나.
극단 신세계의 작품은 공동창작으로 진행되는 만큼 모든 장면은 나를 포함한 동료들의 경험이 합쳐지면서 발현되는 형태고, 그렇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앞서 말한 것처럼 포르노그래피로 만들지 않겠다는 기준은 분명히 있다. 단원이 모두 참여해 성폭력과 위계 폭력에 대한 문서를 함께 만들었다. 프로덕션이 시작될 때마다 이것을 읽고 공유하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누군가 불편함을 느끼면 멈추는 것이다. 그 사람을 피해 당사자로 뒀을 때, 그가 연습을 멈추고 싶다면 멈추고 사과를 받고 싶다면 그 자리에서 사과한다. 폭력적인 장면을 발표할 때 사전에 예고하고 양해를 구하는 게 세 번째다. 예민함을 생활화하려고 진짜 노력하지만 불편해서 미칠 것 같은 때가 있다.
일을 진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불편함에 눈을 감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정말 끔찍했다. 불편해지면 멈추는 방식으로 ‘찹쌀떡’을 말하기로 했는데, 그 단어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말 자체가 누군가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게 되니까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더라. 좋게 넘어가려는 것이 잘못된 사회화라는 것을 천천히 인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힘들다. 얼굴도 빨개지고, 심장 박동도 빨라지고, 내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평가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극단 밖에서도 불편함을 편하게 이야기하고 상대가 라이트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를 원한다.
‘분노’로부터 연출을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지금의 동력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화가 나면 밖으로만 욕을 했는데, 내가 더 잘못한 거였더라.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작품에서 찾는 편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지금 사는 방법이 맞는냐는 고민과 질문으로 작품을 만든다. 나의 하찮음과 부족함, 무지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알아가는 게 재밌다. 예전에는 모르는 것에 화가 났는데, 이제는 모른다는 게 나를 끌고 가준다.
연출가이자 한 인간으로 살면서 무엇을 경계하는가.
잘난 척, 거짓말, 남 탓, 자기 복제, 안주, 칭찬, 비성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