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말하는 사람, Like
성격이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미운정을 쌓다 일련의 갈등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뮤지컬 <레드북>은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 온 로맨틱 코미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서사의 중심에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을 두고 그의 감정과 상황에 집중하자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 탄생했다. <레드북>은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과 갈등을 위해 19세기 영국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선택한다.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려면 남성과는 다르게 “외도 외에도 처자유기, 학대, 강간, 근친상간을 추가적으로 증명”해야 하던 시대. 시대적 특수성 위로는 시대를 초월해 자행되는 각종 여성혐오적인 말과 행동이 공기처럼 펼쳐진다. 여성이 만든 결과물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상식적인 문제 제기에도 답변은 언제나 “오늘 그날이야?”,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상대에게 가하는 성폭력은 또 어떤가. 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이러한 갈등을 남성에 의해 해결한다. 그러나 <레드북>은 “미친년”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이 들은 말은 고스란히 상대에게 되돌려주고, 자신이 쓴 책을 서점에서 판매해주지 않으면 직접 팔고, 성폭력에는 강한 액션으로 대항하는 안나를 보여준다. 덕분에 안나의 이야기는 한 개인을 넘어 여성의 삶 전체로 확장된다. 보수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레드북>은 계급과 성적지향성 차별의 이야기로도 확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작품은 에두르지 않고 여성 인권과 성평등이라는 주제로 직진한다. 가사는 구체적이고, 인물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무대 위 모든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안나는 그 결과로 받게 되는 불합리한 재판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도 승리한다. 승리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무대 위와 아래의 여성에게 용기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나를 말하는 사람이 되도록 응원하는 뮤지컬.
아쉬운 무대의 디테일, Dislike
<레드북>은 균형감이 좋은 작품이다. 장르의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레드북>만의 주제를 발견해 신중하고 단호한 태도로 다룬다. 비판이 가미된 유머는 가볍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경쾌하고 웅장한 음악은 희망적으로 연주되고, 그동안 창작뮤지컬에서는 찾기 어려웠던 라임 살린 가사도 눈에 띈다. 작품의 근본이 되는 극본과 음악의 완성도가 괜찮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 기준을 ‘무대화’에 맞춘다면, <레드북>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공연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자신의 기능적인 부분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사의 모든 것이 대사로만 진행된다면, 이것이 굳이 무대 위의 뮤지컬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의상과 세트가 19세기를 재현하는 그 이상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음악이 다양한 편곡과 연주로 존재감을 더욱 드러낼 수 있다면, 관객이 조명을 통해 인물의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다면 <레드북>은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게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