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뿌리 깊은 나무>, 지금 가장 절실한 리더의 품격 (텐아시아)

사람이 죽었다. 우물과 주자소, 궐의 곳곳에서 네 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죽은 자들의 몸에는 공통적으로 작은 문신이 있었고, 그들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죽는 순간마저도 주먹을 꽉 쥐었으며, 살해 흔적은 자살이나 사고사를 가장한 트릭에 감춰졌다. 수상한 낌새를 맡은 겸사복 채윤(이창희)은 궁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감옥에 끌려왔고, 입이 방정이라 끌려온 옆방의 재담광대 희광이(김병철)는 그런 채윤을 참견한다. 채윤과 희광이는 좁은 감옥에서 4개의 살인사건을 재현하며 조선판 셜록과 왓슨이 되어 용의자를, 살해동기를 찾는다. 피해자들이 꼭 쥐고 있던 종이에 그려진 마방진은 무엇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마방진의 답은 과연 무엇일까. 한판 게임이 시작되었다.
세종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7
지난해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와 연극 <뿌리 깊은 나무>는 뿌리가 같다. 하지만 두 작품은 영상과 무대라는 점 외에도 가지가 다르다. 드라마가 이정명 작가의 동명소설에 살을 붙여 세종과 밀본의 대립, 한글창제를 중심으로 정치의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연극은 한글창제를 넘어 세종의 진의를 알아가는 채윤을 통해 리더의 품격에 주목한다. 이기도 연출은 세종을 통해 “이 시대의 리더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연극에서 한글창제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로 역법과 자격루다. “우리의 우주와 시간을 만들”어 조선을 굳건히 하나의 국가로 세우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기틀 삼아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내는 일. “쉽고 편한, 퀄리티 있는 교양 연극”을 만들고자 했던 연출의도처럼 리더의 품격은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자치와 애민에 스스로를 던졌던 세종은 현실정치에 대한 판타지를 반영하고, 그 모습은 흡사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장르적 특성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15도 가량 기울어진 무대와 영상으로 구현된 마방진 위에서 채윤과 희광이의 추리를 펼친다. 추리는 나름의 긴장감을 가지고, 희광이의 유머는 긴장 속에 이완을 준다. 추리를 진행하는 상황에 따라 마방진의 위치가 달라지고, 마방진의 답을 찾는 과정은 채윤을 비롯해 관객에게도 하나의 유희과정이 된다. 또한 명을 두고 다른 노선을 걷는 세종과 최만리의 대립은 직접적인 대사표현은 물론 세종 궁녀들의 “아으이”와 성균관 후학들의 “맹자왈” 같은 소리로도 구현해내기도 한다. 다만 “보이지 않는 소리”를 문자화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으면 좀 더 극적인 효과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극 <뿌리 깊은 나무>는 10월 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위치한 극장 용에서 공연되며, 공연기간 동안 로비에서는 한글을 이용한 이계진 디자이너의 캘리그라피 작품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