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여자들을 탐하지만 밤이 끝나는 순간 가차 없이 돌아서버리는 <돈 주앙>의 나쁜 남자도, 우유부단한 왕에게 직언을 일삼던 <대장금>의 강직한 충신 조광조도, 몸매를 한껏 드러내고 순진한 처녀 총각을 농락하는 <록키호러쇼>의 괴짜 과학자 프랑큰 퍼터도 없었다. 대신 “전 예비군도 끝났답니다. 복무기간도 1년 10개월로 줄었다면서요? 그게 군댄가?”라며 한 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웃음을 짓는 한 남자, 강태을만이 있었다.
뮤지컬배우로 그를 먼저 만났지만, “클 태에 소리 을. 큰소리 치고 살라”며 아버지가 지어주신 ‘태을’이라는 이름은 락발라드 CD 한 귀퉁이에서 먼저 만날 뻔 했다. “박완규 씨의 <천년의 사랑> 작곡가분이 곡을 준다고 해서 트레이닝 중이었어요. 근데 그때 영장이 나온 거죠.” 억울함을 달래며 군복무를 마친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일본에서 찾아왔다. 서울예대 연극과 34명 중 한 명으로 일본의 유명극단 <사계>(四季) 오디션을 봤고, 그 후 5년간 그곳에서 기본기를 다지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하지만, 개인의 개성보다는 약속이행에 성실한 배우를 선호하는 극단이었던 만큼 자신만의 연기에 대한 오아시스가 절실했다. 그 오아시스를 찾아 2008년 강태을은 한국행을 결심했고,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대장금>, <돈 주앙>, <록키호러쇼> 등을 통해 캐릭터의 거주지도, 성적취향도, 성격도 각각 다른 인물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제 “강태을이 이렇게 찌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내년쯤 로맨틱 코미디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그래서 고른 작품도 바로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 그러고 보니 그 작품 속 황대우도 ‘찌질함’의 궁극이었다.
“찌질한 남자든 그렇지 않은 남자든 사랑을 하는 남자는 참 멋있다, 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굉장히 찌질했던 대우가 미나를 만나 진실 된 사랑을 알아가면서 매력적으로 변하는 부분이 맘에 들었어요. 그래서 멋있기보다는 소심하고 찌질한 캐릭터가 더 어울렸던 것 같기도 하구요. 제 인상이 이렇지만 (웃음) 초등학교 때는 짝꿍 손도 못 잡아서 혼자 얼굴 시뻘게질 정도로 황대우 같은 부분들이 참 많거든요. (웃음)”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은 2006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박용우, 최강희 주연의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을 원작으로 삼았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소심한 영어 강사 황대우(신성록, 김재범)와 우연히 범죄를 저지른 엉뚱한 그녀 이미나(방진의, 손현정)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고 있다. 그동안 선굵은 캐릭터들을 줄곧 담당했던 강태을은 무대 위에서 자유로운 남자캐릭터에 특히 더 마음을 담았다. “아무래도 배우다 보니까 보면서 ‘저 배우는 왜 캐스팅이 됐을까’에서부터 (웃음) ‘내가 한다면 이렇게 할 텐데’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더라구요. 그동안은 캐릭터에 내가 맞춰 들어가야 했는데, 로맨틱 코미디는 나에게 그 캐릭터들을 맞출 수 있을 것 같고, 타이밍과 순발력이 중요한 장르인 만큼 그런 부분들을 배울 수 있었어요.”
2008년을 무대에서 치열하게 보낸 결과, 강태을은 최근 제3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우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 한해 자신에게 신인상을 안겨준 <대장금>과 <돈 주앙>으로 관객들을 다시 만난다. “작품 따라가나 봐요. <돈 주앙>을 하고 났더니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내 여자 같고 그러네요. 하하. <대장금>의 이지나 연출님께서도 “너, 좀 느끼해졌어”라고 하시더라구요. (웃음) 이번 시즌엔 강직하기만 했던 작년에 비해 조금 더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광조를 표현하는 중이에요. 그리고 경희궁은 소풍 온 기분도 들고, 여러 가지 묘한 매력들이 있어서 좋아요. 작년에는 첫 공연 리허설 도중에 저기 하늘로 무지개가 뜨기도 했었어요.” 고궁뮤지컬 <대장금>은 선선한 바람에 날리는 꽃내음과 은은한 달빛 덕에 객석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실제 조선의 거리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치열한 당쟁 속에서도 죽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던 조선의 충신은 다가오는 7월, 태양이 작열하는 스페인의 세비아 거리로 다시 돌아간다. “매 공연 최선을 다하는 배우”로 비춰지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대로, 앞으로도 강태을이 서있는 곳은 뜨거운 태양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양에너지라면 온몸이 까맣게 그을린다해도 마냥 행복할 것만 같다.
<마이 스케어리 걸> ‘Rough and Tough’
소심한 재우에게 친구가 전하는 조언 하나. “요새 여자들은 자상하고 따뜻한 윤지후 같은 스타일의 남자보단 거칠고 만만하지만 나쁜 남자 구준표를 더 선호한단 말이지.” 그리고 그 말에 ‘옳타쿠나!’ 하던 재우는 터프하게 “영화 한편 보자, 이 여자야!”라며 고백한다. “아, 그건 정말 저도 해봤던 거예요. 대학 다닐 때 너무 어여쁜 학생이 있었는데 고백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으니까, 선배 하나가 오더니 남자답게 소리 지르면서 “야, 데이트 한번 하자”라고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짜고짜 가서 자기소개를 하고 “밥 한번 먹자! 데이트 한번 하자!”라고 했었죠. 듣더니 그 여자 분이 깜짝 놀라서 그 이후부터 저만 보면 도망가시더라구요. 하하. 근데 <마이 스케어리 걸>에 그 장면이 있더라구요. 그걸 보는데 혼자 뒤집어졌죠.”
마지막으로 최근의 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클림트, <파우스트> 그리고 특허감으로 생각 중인 패션까지 다양하게도 줄줄 쏟아져 나온다. “나중에 아버지랑 같이 ‘파더 앤 선’이라는 옷도 하나 만들 거예요. 다른 아버지들과는 달리 저희 아버지는 배기팬츠에 닥터마틴 구두, 그리고 군용점퍼를 입고 다니시거든요. 그래서 나중에는 꼭 옷도 하나 내고, 레스토랑도 하나 런칭하고, 전시도 할 거예요. 하하” 우린 뮤지컬배우로 그를 먼저 만났지만, 언젠가는 대박 CEO로 그의 이름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이런 욕심쟁이를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