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엘리자벳>, 배우 류정한 (텐아시아)

대부분의 오래된 연애가 그러하듯, 사랑이 빛을 잃고 그저 정으로 혹은 안락함으로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었다. 잠깐 한 눈을 팔았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었고, 어느 순간엔 헤어질 법도 했다. 한데 이 남자, 류정한의 사랑은 여전히 넓고도 깊다. 굳건한데다 심지어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마흔하나, 그의 얼굴에 언뜻 소년의 얼굴이 비치는 것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는 뜨겁고 묵묵히 그리고 처음의 설렘을 잊지 않은 채 그저 지금을 사랑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류정한이 뮤지컬이라는 애인과 15년째 열애하는 법이다.
류정한과 함께 커 온 한국뮤지컬시장
류정한의 성장은 곧 한국뮤지컬시장의 성장이었다. 그는 1997년 클래식에 비해 레벨이 낮다고 치부되었던 뮤지컬시장에 홀연히 나타난 성악전공자였다. 고전적이면서도 안정적인 발성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안으로 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잘 들어맞았고, 소화할 이가 없어 음역대를 낮출 수밖에 없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곡은 그를 만나 비로소 원래 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정확한 발성과 가창력이 뮤지컬의 기본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류정한을 시작으로 김소현과 김선영, 민영기와 양준모 등이 등장하면서 시장에 더 많은 선택지가 던져졌다.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라울”은 한일월드컵 기간임에도 ‘<오페라의 유령> 유료객석점유율 98%’라는 수치와 함께 찾아왔다. 성악도, 뮤지컬도 원해서 시작하지 않았지만 들어온 이상 늘 1등이었던 천재.
그러던 그가 “lover”를 버리고 반란을 꿈꾸기 시작한 건 2004년 <지킬앤하이드>에서였다. 테너와 베이스를 오가는 1인 2역에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비극적 결말의 스릴러. 함께 캐스팅된 조승우에 비해 대중적 주목도는 낮았지만, 정갈하고 진중한 목소리의 지킬은 신사였고 천둥 같이 터져 나오는 탁성의 하이드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은 “지킬과 하이드 페이를 따로 다 줘라”는 말로 류정한을 인정했고, 브로드웨이에서도 실패한 <지킬앤하이드>가 한국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히려 그는 더 강하고 독특한 작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늙은 기사 지망생(<맨 오브 라만차>)으로, 사랑을 위해 비수를 감춘 남자(<쓰릴 미>)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발사(<스위니 토드>)로. 공연당시 상대적으로 생소했던 작품들은 오로지 뮤지컬만을 고집해온 류정한의 성실함과 독특한 장르가 결합되어 힘을 얻었고, 그의 선택으로 시장은 다양성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지치지 않는 사랑이 가져올 다음 이야기
다가오는 2012년, 류정한은 다양성 이후의 스텝을 준비 중이다. 데뷔부터 현재까지 드라마틱한 사연의 중심에 있던 그가 <엘리자벳>을 통해 자신이 가진 몫을 서서히 나누고자 한다. 재능의 씨앗이 보이는 후배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드라마틱한 삶을 연기할 여배우에게는 커튼콜의 마지막 자리를 말이다. 엘리자벳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지막순간까지 주위를 맴도는 ‘죽음(Tod)’처럼, 류정한은 소망한다. 보이는 존재이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주인공을 빛내고, 시장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조력자로 남기를. 뮤지컬시장이 꺼질 듯 꺼지지 않는 거품으로 가득한 현재, 그리하여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선택은 다시 한 번 판을 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류정한의 힘이다.
돈키호테는 노래한다.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그가 거쳐 간 20여편 중 <맨 오브 라만차>를 아직 놓고 싶지 않은 작품으로 꼽는 이유다. 류정한은 돈키호테를 닮았다. 여전히 지치지 않고 행동하는 바로 그 라만차의 기사. 자신의 영달보다는 정의가, 자신이 속한 이 세계가 더욱 소중한 사람. 그리고 세상에서 뮤지컬을 가장 사랑한 남자. 그저 자신을 향한 수식어는 ‘뮤지컬배우’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사랑이, 이 남자의 노래가 오늘도 마음을 적신다. 되도록 더 긴 시간, 더 많은 작품으로 우리 곁에 있어주길.
류정한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배우는 작품으로 얘기해야 한다.”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양하고 드라마틱한 인물을 주로 연기해왔던 그는 셔터 소리가 갱신될 때마다 20여 개의 인물을 소환해냈다. 여유로운 미소로 <아가씨와 건달들>의 스카이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서늘한 눈의 <쓰릴 미> 속 ‘나’가 되어 있었다. 환히 웃을 때는 <넌센스 잼보리>의 버질 신부였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응시할 때는 정의를 외치는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였다. 하지만 그런 류정한이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은 사진촬영 막바지 수줍게 “저 준비해온 거 있는데 같이 찍어도 돼요?”라며 ‘건승정한’ 플래카드를 꺼내던 때였다. 악을 처단하고 복수를 위해 포효하던, 뮤지컬무대에서만큼은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던 류정한의 수줍음이라니!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랜 시간 오롯이 뮤지컬 하나만을 고집하며 살아온 자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연기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류정한의 러브레터가 여기 있다.
올 4월 <몬테크리스토> 이후 무대에서 보기 어려웠는데 어떻게 지냈나.
류정한: 테너 배재철의 이야기를 다룬 <기적>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었는데, 촬영이 딜레이 되면서 의도치 않게 6-7개월을 쉬게 됐다. 작정하고 쉰 적은 있어도 이런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정작 무대에 서고 싶을 때 설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보니 ‘내가 이걸 이만큼 좋아했구나’라는 것도 새삼 다시 느끼게 됐다. 지금은 18일에 열리는 팬클럽 ‘건승정한’ 10주년 콘서트에 총연출로 참여하고 있다.
팬클럽 창단 1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라는 점, 특별손님이 아닌 총연출로 참여한다는 것들이 신기하다.
류정한: 5년 전 데뷔 10주년 콘서트를 하려고 했었다. 다행히도 극장마다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안을 해주셨는데, ‘좀 건방지지 않나’ 라는 생각도 있고 나중에 한 20년쯤 되면 부끄럽지 않겠다 싶어서 일단 포기 했다. 올해 팬클럽 10주년이 되면서 그 얘기가 다시 나왔는데 생각을 바꿨다. 당신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이게 어쨌건 표를 팔아서 하는 공연이다. 처음 리허설을 갔을 땐 이거 아니야, 너네 이렇게 하면 욕먹어 막 이랬다. 내 생각만 한 거지. 이게 안 돼? 왜 안 돼? 이러고. (웃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야 업이니까 아침부터 연습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렇지 않잖아. 아마 영화를 원래대로 찍었다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몰랐을 거다. 그래서 총연출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조언을 해주고 참여를 북돋는 정도로 관여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이 아닌 그들에게로 방향 선회를 한 이유가 있었나.
류정한: 2001년에 건승정한이 생겼고,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PC방 가서 봤는데 누가 막 후기를 써놓고 그랬더라. 너무 충격이었고, 그래서 독수리타법으로 답글을 다 달았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10년째다. 계속 건승정한이 팬클럽이 아닌 뮤지컬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나도 나중에 공연하지 않게 되면 단관 다니면서 좋은 공연 보고 후기도 쓰고 재밌게 지내고 싶다. 그래서 되도록 건승정한에서는 내 색을 빼려고 해왔고, 큰 사고 없이 뮤지컬 팬클럽 사이에서도 기준이 되어온 것 같다. 10년, 아주 아주 뿌듯하다. 뮤지컬시장이 커지면서 팬클럽 수도, 프로 못지않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느끼는 것과 달리 스스로 직접 공연을 준비하면서 무대에 서는 게 얼마나 힘들고 재밌는 일인지를 알게 하고 싶었다. 다른 팬클럽 역시 이 공연을 보고 ‘배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도 즐겨보고 싶다’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고.
사진 찍을 때 ‘건승정한’ 플래카드를 꺼내서 놀랐다. (웃음) 단순한 팬이 아닌 동료로 보는 것 같은데 그들과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 편인가.
류정한: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시장에 대한 얘기를 팬들에게 전혀 하지 않는다. 어쨌건 나를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인 만큼 내가 얘기를 하면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배우생활 하는 동안에는 되도록 공연으로 보여주겠다고 얘기했다. 차 한잔하면서, 술 한잔하면서 할 수 있는 얘기가 다른 것처럼 내가 초이스 하는 공연들에는 분명히 각기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 작품들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초연작을 주로 하며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해왔다. 그런 선택이 작품의 다양성이나 관객 눈높이에 기여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내년에 하는 또 다른 초연, <엘리자벳>을 통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나.
류정한: 굉장히 방대한 작품인데, 우리나라 <명성황후>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거다. 처음엔 오스트리아 황후 얘기를 굳이 우리나라에서 해야 되나 싶었다. 그런데 상황과 나라, 옷만 바뀔 뿐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다. 부조리나 정의 같은 것들. <스위니 토드>도 그렇고, <맨 오브 라만차>도 그랬다. <엘리자벳>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벳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 안에 각자의 캐릭터가 살아 있고, 그로 인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자벳>은 사실 여성 원톱 뮤지컬이다. 데뷔 때부터 줄곧 주인공을 맡아왔던 류정한으로서는 새로운 시도이지 않나.
류정한: 내가 맡은 ‘죽음(Tod)’은 등장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를 떠나서 관객에게 많은 걸 제시해주는 캐릭터다.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일 수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존재일 수도 있는 캐릭터라서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서브는 2003년 <킹앤아이> 이후 처음인데, 이 작품은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 시장이 너무 편향적인 부분이 있어 국내에서 공연되는 많은 뮤지컬 중 여배우 원톱인 작품이 별로 없다. <엘리자벳>, <에비타> 같은 공연이 잘 돼서 여배우 혼자서도 극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서포트를 잘 해줘야 된다. 그들이 빛나게.
판타지적 요소도 많은 토드는 류정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류정한: 근데 뭐 류정한이 그렇지, 그럴 수도 있다. (웃음) 코미디를 하건 비극을 하건 류정한이 하는 거니까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거다. 초연 때는 그래서 더 신중히 하게 된다. 라이선스의 경우 영상이 있으면 한 번은 보는데 그 뒤로는 절대 보지 않는다. 대본 가지고 싸우지. 그래서 영상에서 보는 외국배우 연기와 내가 하는 연기가 다를 수도 있다. <스위니 토드>도 외국영상을 미리 접하고 내 공연을 본 관객들은 무슨 스위니 토드가 이렇게 약하냐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 광기 어린 연기,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스위니 토드는 인간이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사람을 연기하고 싶었다.
데뷔 15년 차에도 여전히 지치지 않고 더 잘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이 뭔가.
류정한: 옛날에 좋아했던 찬송가가 있다. 내일 일은 남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안 돼요. 아하하하. 초등학교 때 꿈이 슈퍼마켓 주인하고 오토바이 가스 배달부였다. 그 이후로는 꿈이 없었다. 뮤지컬도 성악도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냥 물 흐르듯 이렇게 왔다. 사실 배우가 진짜 나한테 맞는 옷인가를 계속 질문해왔다. 난 항상 공연하는 게 부담스럽고, 즐거워서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 번다고 부러워한다. 그런데 왜 이걸 계속하는지 생각해보니 이것만큼 나를 긴장시키는 일이 없더라. 옛날엔 그 긴장이 싫고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 긴장 자체, 두려워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2시간 동안 공연할 체력이 안 돼서 공연을 못 하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더 알게 되겠지.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했는지. 지금도 배워가는 것 같다.
클래식으로 시작해 뮤지컬로 옮겨왔는데, 연기적인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류정한: 처음엔 절대 아니었다. 연기는 아예 안 해도 되고 노래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아주 많이 바뀌었다. 옛날에는 음표 하나하나 다 정확하게 맞춰서 노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런 걸 놓았다. 노래를 누가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성악적 발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주 거칠지만 록적인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목소리의 매력, 그 역할에 얼마나 어울리는 목소리인가가 더 중요하다. 노래도 연기도 객관적 순위를 매길 수 없다. 연기에 맞는 노래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요즘 부쩍 더 많이 한다.
연기에 맞는 노래란 무엇일까.
류정한: 뮤지컬넘버는 대사다. 특히 선율이 좋으면 그만큼 가사, 즉 그 캐릭터의 대사와 감정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노래하려고 덤벼들면 사람들이 노래를 듣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정확한 발성을 써야 되고, 딕션이 안 좋으면 선율적으로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다 소용없다. 소극장에서는 툭툭 던져도 다 들리지만 대극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
긴장은 유난히 다른 배우들에 비해 많은 무대에 대한 경외심 때문인 것 같다.
류정한: 무대를 자기 집처럼 대하고 편하게 공연하는 배우들을 보면 지금도 부럽다. 내가 그런 걸 잘 못하니까 그런 배우들하고 공연할 때는 따라도 해본다. 근데 안 된다. 그래도 지금은 좀 많이 풀어졌는데, 여전히 공연 시작 4시간 전에는 공연장에 가 있어야 되고 그런다. 성격인 것 같다. 난 뮤지컬배우가 굉장히 멋진 일이고 또 그만큼의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시상식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토니 어워즈나 영국의 올리비에 어워즈는 뮤지컬에만 국한된 시상식이 아니다. 우리도 엔터테인먼트 전반을 다루는 시상식에서 권위 있는 결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뮤지컬 시상식이라면 차라리 상 주지 말고 진짜 제대로 축하무대 잘 찍어서 프라임타임에 한번 내보냈으면 좋겠고. 뮤지컬배우들도 영화배우, 탤런트 못지않게 가진 게 많다.
무대에 대한, 이 판 전체에 대한 그런 마음가짐 덕분인지 여전히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실력과 위치임에도 <엘리자벳>을 계기로 서서히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류정한: 내가 마흔이 넘었는데, 우리 위에 있는 선배들도, 나도, 내 또래 다른 배우들도 그 나이에 분명히 해줘야 할 것들을 많이 못 하고 있다. 주, 조연을 떠나서 이 시장에 계속 남아 있어야 후배들도 그 사람을 보고 꿈을 갖게 된다. 사실 배우를 업으로 가진 사람들은 쉽게 못 놓는다. 하지만 선배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후배가 더 빛날 수 있고, 멋지게 했던 배우들이 엄마, 아빠 역 하면서 무게를 잡아주는 것도 중요하다. 자기 나이에 맞는 역들이 있다. 나이 많은 사람이 혹은 어린 사람이 주인공인 작품도 있고, 주인공은 아니지만 중년 배우들이 굉장히 서포트를 잘해줘야 하는 작품도 있다. 배우 인권을 위해 뒤에서 노력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배우는 무대에서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어린 배우들도 그게 당연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리지 않나.
류정한: 나도 주인공 떠나야 될 나이가 거의 다 됐다. ‘할 수 있겠냐’ 라고 스스로 질문해봤는데 역시 쉽지 않다. 커튼콜 때 내가 제일 마지막에 나왔는데, 이제는 먼저 나와서 인사하고 박수쳐줘야 되고. 이걸 내가 해야 돼? (웃음) 인간적으로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지인들도 공연 안 하면 안 했지 절대 못할 거라고 한다. 그런 얘기 들으면 ‘그래, 못하겠지’ 이런다. (웃음) 근데 누가 그러더라. 한번 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하고 나면 되게 편하다고. 누구는 옛날에 주인공 안 했나? 다 했지. 김장섭 씨 옛날에 팬텀이었는데 지금은 다 한다. 근데 그 형님이 되게 편해 보인다. 배역에 대해 편해지니까 공연 자체를 즐기면서 하는 거다. 나도 오랫동안 남아서 후배들 다독거리면서 공연이 산으로 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류정한: <오페라의 유령> 마지막 공연 날이었다. 원캐스트로 260회 이상을 공연했었는데, 발목을 심하게 다쳐서 후반부에는 얼터(어떤 역에 교대 출연시키기로 미리 정해놓고 훈련하는 배우로, 해당 배우가 사정상 출연하지 못했을 때 무대에 선다)가 공연을 하게 됐다. 근데 막공 낮 공연까지 얼터가 하니까 너무 억울한 거다. (웃음) 그래서 아는 의사한테 부탁해서 몰핀을 맞고 무대에 섰다. 그때는 공연 시작 전 캐스팅을 불러줬는데 “라울에 류정한” 하니까 객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고 순간 눈물이 나오더라. 난 주인공도 아닌데. 그 상태로 공연하고 커튼콜을 나갔는데 LG아트센터 정 가운데 120석이 오렌지색으로 가득한 거다. 건승정한 색이 오렌지인데 (웃음) 혹시라도 객석을 봤을 때 힘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3개월 전에 티켓을 구입해 티를 맞춰 입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때 이후로 그 친구들에게 책임감도 느끼고, 공연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나한테 정말 좋은 영향을 많이 줬다.
팬은 진짜 배우를 따라가나 보다. (웃음) 말보다는 행동으로,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시선을 가진 류정한의 길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2004년부터 했던 <지킬앤하이드>도 올해로 마지막이라고 선언한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류정한: 나이 오십 넘어서 정말 5회 정도 스페셜하게 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그 나이대 배우들이 많이 남아 있을 거니까 옛날 생각하면서 할 수도 있겠지. 그건 온전하게 그 작품을 응원하겠다는 의미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외국에서는 4, 50대 배우들도 얼마든지 지킬을 한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게 뮤지컬은 결국 재공연을 계속할 수 있는 게 좋은 공연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관객들도 다른 캐스팅을 보고 싶어 하고, 기존에 했던 배우들과 비교도 하고, 어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지 기대도 한다. 그런 게 공연이고, <지킬앤하이드>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 더 좋은 배우들이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객석에서 보면 재밌잖아. 지킬,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다. 하하하하하
‘이 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되는 일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류정한: 처음엔 배우가 아니라 카메론 매킨토시(4대 뮤지컬이라 불리는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의 프로듀서)처럼 되고 싶어서 뮤지컬을 시작했던 거다. 그래서 유학도 경영 쪽으로 갔었다. 앞으로는 배우를 하면서도 부추길 것들은 부추기고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하며 뮤지컬 전반에 참여하고 싶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만큼 뜨거운 뮤지컬 관객들이 있는 곳이 없다. 그래서 희망은 있다. 환경이 만들어지고 정화가 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했던 멋진 일들이 펼쳐질 거다. 20년 딱 됐는데 똑같구나, 역시 안 되는구나, 생각되면 되게 슬플 것 같아. 예전보다 환경이 많이 좋아졌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가 문제다. 그래서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해도 안 돼’라 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된다. 그리고 클래식이 됐건 오페라가 됐건 한 번 정도는 제작하고 싶고.
뮤지컬 프로듀서는?
류정한: 그건 너무 힘들어서 안 할 거다. 멋진 것만 생각하다 프로듀서들 만나보니 내 성격에 진짜 큰일 나겠다 싶더라. 프로듀서는 크리에이티브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환경이 안 돼서 돈부터 생각해야 하니 창작 대신 라이선스 작품을 계속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 굳건하게 프로듀서 한다는 거 진짜 대단한 거다. 난 프로듀서들이 전세기 타고 다니면 좋겠다. 전세기를 타는 거 자체가 멋진 게 아니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보상받는 것 자체가 부러운 일이 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판을 짜고, 좋은 창작을 만들어서 외국에 팔고. 그리고 관객은 우리가 연예인처럼 TV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 비싼 돈 내고 공연을 관람하는 분들인 만큼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족시키려면 더 좋은 걸 보여줘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뮤지컬이 진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 거품도 많이 사그라질 거고, 정말 뮤지컬 해야 되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양질의 공연을 만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팬들은 굉장히 중요하고, 그들 역시 좋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결국은 배우, 제작자, 관객까지 모두가 같이 이뤄나가야 되는 일인데, 그럼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류정한: 첫 번째는 무조건 공연에 올인 해서 열심히 해야 된다. 배우가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게 자기 공연인데, 주변 것들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공연이 산으로 간다. 두 번째는 배우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되는 거고, 세 번째는 자기관리. 그리고 네 번째는 관객에게 좋은 얘기를 공연으로 해야 된다. 다 공연에 대한 거지 뭐.
전동석처럼 제 2의 류정한을 꿈꾸는 후배들이 많아졌고, 소위 일가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단계별로 고민하기 마련인데 요즘의 고민은 뭔가.
류정한: 결혼. 하하하하하하하. 어떨 때 보면 내가 너무 한심하다. 결혼한 주변 사람들은 나한테 죽어도 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들은 다 했으면서. (웃음) 근데 그들이 욕하고 싫어하는 게 난 지금 부럽다.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특별히 없는데,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부럽고 위대해 보인다. 정말로 진심으로. 진짜 나를 인정하고 내 편인 가정이 생긴다면 배역이나 작품에 대해 편해질 것 같다. 아직까지도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의식하는 게 분명히 있는데 그런 게 없어지면 연기적 스펙트럼도 넓어질 것 같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바보같이 용기도 더 없어지고, (웃음) 하려고 하니까 더 힘들어진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확실히 류정한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결혼이나 부인이 제일 먼저 나온다. (웃음)
류정한: 그거 왜 나오는 거지? 예전에 그걸 검색하고 온 사람과 만난 적이 있는데 결혼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묻더라. (웃음)
오랜 시간이 흘러서 대한민국뮤지컬사 같은 책이 나온다면, 류정한은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가.
류정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꿈은 평생 늙어 죽을 때까지 팬들 만나고 관객 만나는 거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50대에는 건축과 요리, 내가 좋아하는 거 배우면서 학생이었으면 좋겠고, 60대에는 그걸 실현해보고 싶다. 공연도 계속 보러 다니고. 그러려면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야 그 나이에도 공부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그냥 뮤지컬배우 류정한으로 평가받고 싶다. 배우 류정한도 아니고 뮤지컬배우 류정한. 그게 내 타이틀이고, 공연을 안 하게 됐을 때 자식이 “아빠 예전에 뭐 했어?” 그러면 “뮤지컬배우”라고 얘기할 거다. 그래서 자료는 몇 개 모아놨다. 안 믿을까 봐.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