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상징이 된 뱀파이어의 비극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비극이 명확한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비극으로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느냐에 있다. 익숙함의 새로움을 위해 2014년 뮤지컬 <드라큘라>의 초연은 거대한 규모의 회전 무대를 이용한 시각적 자극을 주로 썼다. 공간의 이동을 실시간으로 구현해낸 장면은 눈길을 사로잡으며 작품의 안정적인 시작을 알렸지만, 닳을 대로 닳은 이야기를 새롭게 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렇기에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뮤지컬이 힘을 주는 것은 드라마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미나가 있다. 여성은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극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미나가 중심을 잘 잡아야 사랑도, 여성의 욕망도, 내면의 혼란도, 드라큘라의 고민까지도 제대로 보인다. 드라큘라의 사랑이 비극의 소재임에도, 작품은 한동안 드라큘라의 입장만을 대변해왔다. 미나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6년이 흐른 셈이다. 그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기다리는 대신 먼저 움직이고, 불편한 지점이 있으면 감정을 감추는 대신 부드러운 방식으로 문제를 지적한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행동이 그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조정은은 한 권의 책을 쓰듯 장면과 넘버에 명확한 목표와 단계를 설정해 미나를 표현한다. 표정과 목소리, 몸짓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섬세하게 운영하는 그는 미나의 감정을 객석에 전달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그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 결과 관객은 낯선 인물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강하게 이끌리는 미나의 정서를 따라간다. 관객 개개인의 경험치와는 무관하게 미나의 마음 속 동요가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뱀파이어와의 사랑이라는 비극적 판타지를 가깝게 받아들이게 된다.
전동석 역시 10년간 쌓아온 기술을 드라큘라에 몽땅 쏟아 붓는다. 성대를 긁어대는 수준의 발성이 아닌 묵직한 바리톤의 음성에는 나이든 백작의 기품이 있다. 뮤지컬 <헤드윅>에서 체득한 움직임은 새 생명을 얻은 뱀파이어의 기쁨을 뽐낸다. 큰 키와 단정한 외모는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기가 된다. 전동석이 표현하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자신의 품위도 잃지 않는 이성의 존재는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며, 이성적 판단과 본능적인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조정은의 표정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낸다.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케미스트리 덕분에 <드라큘라>의 대표곡으로 손꼽히는 ‘Loving you keeps me alive’는 무대에서 들었을 때 더 빛을 발한다. “그댄 내 삶의 이유”라는 가사는 기차역이라는 공간과 기승전결을 담아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져 감정을 시·청각적 요소로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이 작품이 뮤지컬이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얻는다.
종종 대극장 뮤지컬에서 남성은 일방적인 구애를 하고 여성은 받아들이는 존재로만 표현된다. 미나에 대한 드라큘라의 사랑 역시 그가 이루지 못한 지난 사랑에 대한 대체로부터 시작된다. 때문에 과정의 섬세함이 있어야만 드라큘라가 미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이 아닌 행복한 삶을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론에 힘이 실린다. 작품은 차곡차곡 쌓아올린 미나와 드라큘라의 성격과 매력을 바탕으로 또렷한 캐릭터를 만든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존재의 상호작용이 사랑임을 설명하고 이 비극성이 관객의 감성을 움직인다. 오래된 소재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시대에 맞춘 과감한 변화와 치열함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