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몬테크리스토>, 배우 차지연 (텐아시아)

차지연에게는 잔인하도록 미안한 얘기지만, 몇년 전 그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한다. 은행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면, 친구의 오디션 전화를 무의식중에 받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뮤지컬배우 차지연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 노래를 잘하는 뮤지컬배우는 많다. 하지만 폭발적인 가창력 속에 깊은 슬픔을 담아 노래하는 배우는 많지 않다. 안정적인 저음과 쇳소리가 살짝 섞인 고음, 그 이중성 안에서 차지연은 자신의 강한 이미지에 가려진 여리고 상처 받은 내면을 세상 밖으로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2009년 뮤지컬 <드림걸즈>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제니퍼 허드슨이 맡은 에피는, 폭발적인 가창력은 물론이거니와 촘촘히 살아있는 여린 감성이 중요한 배역이었다. 데뷔 4년차, 노래 잘하는 여배우란 여배우는 모두 봤다는 1200:1의 오디션을 뚫고 에피 역에 캐스팅된 차지연에게 ‘신데렐라’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수식어가 무색하도록 길고 어두운 길을 돌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국악인 집안이 물려준 운명의 길과 가수가 되고 싶어 수많은 기획사를 전전하던 꿈의 길을 거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던 상실의 길 한복판에 서있을 때였다. “뮤지컬은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고, 앙상블이나 얼터라는 단어의 개념조차 생소한” 차지연 앞에 ‘뮤지컬’이라는 곧게 뻗은 신작로가 불쑥 뛰어 들어왔다. “신데렐라라는 수식어 때문이 아닌, 역할 하나를 따기 위해 몇 년씩 준비하는 기존 배우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뮤지컬은 제가 노래할 수 있도록 허락한 유일한 무대였기에 절대 배신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강했구요.” 그래서 그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좁은 방에 갇힌 사람처럼 앞만 보고 내달렸다. “오해도 받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에게 옆과 뒤는 없었다.
겨우 찾은 길을 오로지 치열함만으로 퍽퍽하게 만들어 가던 때, 길가에 따스한 햇볕을 비추고 잡초를 뽑아내 꽃을 심어 준 건 최근작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다. “여자가 됐어요. (웃음) 사실 이렇게 사랑받는 역할을 처음 해보거든요. 그래서 너무 어색했는데, 제겐 없었다고 생각했던 여성스러움이 배우와 스태프들 덕에 많이 나타나서 스스로의 삶도 풍성해졌어요.” 사랑을 잃고 비틀거리던 에피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선덕여왕>의 미실을 거쳐 입게 된 메르세데스의 옷은, 잊고 있었던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몬테크리스토>를 하면서 안팎으로 모든 사람들이 감사하고 소중해져서,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주변사람들에게 진실로 다가가려구요. 믿음을 주는, 책임감 있는 배우도 되고 싶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사라졌다 느꼈던 여유나 자신감을 찾을 수 있어서 저에게 <몬테크리스토>는 선물 같은 작품이에요.”
“여러 가지 창법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고 싶어” 메르세데스를 선택한 그가 올해가 가기 전 꼭 해내고 싶은 일은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것이다. 데뷔부터 현재까지 대부분의 작품에 더블캐스팅 되면서 언제나 다른 이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차지연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CD 한 장을 준비 중이다. “장르별로 잘 하는 가수들은 너무 많지만, 모든 장르를 파워풀하게 소화해내는 인순이, 이은미 선배님의 맥락을 잇는 여가수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어요. 퍼포먼스가 뛰어나면서도 라이브를 기가 막히게 잘 해내는, 비욘세의 무대처럼요.” 내내 반달눈으로 웃던 그가 결코 쉽지 않은 길 위에서 “도전에 있어서의 용기는 꼭 필요하다”며 예리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조건 하나. “뮤지컬배우라는 명칭을 먼저 가졌으니 거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완성도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어요.” 참 다행이다. 차지연이라는 뮤지컬배우를 가질 수 있어서.
My name is 차지연.
1982년 2월 22일에 태어났다. 2가 네 개라서 행운의 숫자는 당연히 2라고 생각한다.
걸그룹을 준비하는 6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나보다 훨씬 마르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작은데, 노래는 나랑 비슷하게 부르고 흑인처럼 춤도 너무 잘 춘다. 끼가 많은 동생을 보면 가끔 쟤는 뭘까, 싶을 때가 있다. 어릴 땐 늘 싸웠는데, 요즘은 동생이랑 제일 친하다. 나는 철이 없고, 동생은 성숙해서 스물일곱 언저리에서 만난다. (웃음)
외가가 국악인 집안이라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언제나 무릎을 꿇은 채 밥을 먹었고, 남자들과 겸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한국식 전통장례를 집에서 치르기도 했는데,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사실 생계를 위해 뮤지컬을 시작했다. <라이온킹>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6~7년 동안 수만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오디션에 붙으면 일본 사계 소속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월급이 당시 알바비보다 훨씬 많은 액수라 오디션을 본 게 시작이었다.
2009년 <드림걸즈> 에피를 맡으며 체중을 15kg 늘렸고, 공연종료와 함께 하루에 4~6시간을 걸으며 다이어트를 했다. 당시 살던 곳이 강북이었는데 일부러 약속을 강남에 잡아 걸어갔었다. 여의도-한강대교-용산-삼각지-이태원-한남대교-신사-강남구청역-청담동 이렇게.
킥복싱도 하는데, 다이어트에는 줄넘기가 최고다. 체육관 다닌 지 둘째 날이 되던 날 관장님이 직업을 물으시길래 뮤지컬배우라고 했더니 신인왕전 준비하자고 하더라. (웃음)
<몬테크리스토>의 첫공연이 끝나고는 연출가 로버트 요한슨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연출가 중에 가장 따뜻한 사람이었다. 배우로서의 조언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에도 너무 아껴주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작품이 끝나면 미국에 가서 너무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 정도다.
울보라는 별명이 생길 지경이다. 오늘은 촌스럽게 울지 말아야지, 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커튼콜에 나가도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순간 울컥해진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 많은 박수를 주시는지.
3명의 에드몬드 중 (류)정한 오빠는 진득한 사골국 같다. 왜 사람들이 류정한, 류정한 하는지 알겠더라. 안정적이고 차분하면서도 너무 잘 포용해줘서 나도 덩달아 무대에서 더 침착해지고 무게감이 있어진다.
(엄)기준 오빠의 경우엔 감정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다. 하나의 신을 연습하더라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오빠의 눈빛이 참... 고독하고 쓸쓸하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또 그 눈빛을 좋아하고.
(신)성록이는 3명의 에드몬드 중에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준다. (웃음) 셋 중에 나와 가장 많이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공연 시작 전 매번 분장실에 찾아와 잘하자고 격려해주고 간다. 참 낭만적인 사람이다.
에드몬드와 몬데고 사이에 있는 메르세데스의 감정이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랑에 실패하고 힘들 때 누가 옆에서 계속 자극을 주면 거절하다가도 슬슬 마음이 가지 않나, 몬데고를 향한 감정은 그런 마음이라고 봤다. 그리고 지독한 모성 때문이기도 할 테고.
사실 이 모든 건 알버트 때문이다! 공연을 하면서 (김)승대 오빠와 (전)동석이를 보면 이게 내 아들들인가 싶다. (웃음) 노래들도 어찌나 잘하는지! 나중에 저런 아들 만나고 싶다.
며칠 전 <인터미션>이라는 앨범을 냈다. 뮤지컬배우 여덟 명이서 만든 앨범인데, 우리끼리는 “완전 소장용 앨범”이라며 자축하고 있다. (웃음) 차지연하면 파워풀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편이라 잔잔하게 속삭이는 음악을 해보자 해서 故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를 불렀다.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선배들이 포진해있는데, 혼자 유일하게 피죽도 못 먹은 애처럼 노래를 했다. (웃음) 그런데 내 노래는 <정지영의 스윗뮤직박스>처럼 새벽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요즘은 <스파르타쿠스> 때문에 죽겠다. 뮤지컬이나 연극보다 더 빠져있다. 오죽하면 핸드폰 바탕화면에 그 사진을 깔았겠나. 그런데 이 작품은 OCN 버전 말고 무삭제판으로 봐야 된다.
나도 정말 노개런티로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 감독님을 향한 절절하고 뜨거운 내 마음이 제발 전해졌으면 좋겠다. (웃음)
남자배역을 할 수 있다면 무조건 <헤드윅>을 하고 싶다. (강)태을 오빠를 통해서 제작사에 전화도 했었다. 마지막에 토마토 던지는 신을 할 수 있겠냐고 묻던데, 거기서 망설여지더라.
다이어트를 하고 라인을 위해 발레를 잠깐 배워봤는데, 나하곤 궁합이 안 맞더라. 일단 핑크, 그리고 레이스가 나랑 너무 안 어울린다.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