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금 자라는 중입니다 (텐아시아)

하나의 작품이 소비자 앞에 전시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는 상업성과 대중성이 보장되지 않는 작품에는 유예기간을 주지 않는다. 타 장르에 비해 순수하다 여겨지는 공연시장 역시 쉽지 않은 제작여건과 수익의 압박으로 신작보다는 재공연을, 창작보다는 검증된 라이선스 뮤지컬이 선호되었고, 그 결과 2010년 올 한해도 스타캐스팅을 담보로 제작된 라이선스 작품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2-3년 사이 젊은 창작자를 발굴·지원하는 이른바 ‘아트 인큐베이팅’이 본격적으로 등장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외국에서는 정식 공연 전 다수의 공개워크숍과 쇼케이스 등을 열어 투자의 가능성과 미래 관객들로부터 다양한 피드백을 받으며 경험치를 쌓아가지만, 국내무대에서는 그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없었다.
국내공연시장에는 문광부의 ‘창작팩토리’와 서울문화재단의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 아르코 예술극장의 ‘봄작가, 겨울무대’ 등 다수의 아트 인큐베이팅이 진행되고 있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프로젝트는 2007년 재개관과 함께 계속되어 온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와 2010년 CJ 아지트에서 진행중인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초기의 인큐베이팅이 제작비 지원에만 그친 것에 비해 최근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은 제작비를 비롯해 배우캐스팅, 연습실 대여, 데모 음원 제작, 이후 공연장 대관 등 제작전반에 필요한 구체적인 부분까지 지원하며 창작자들의 든든한 동료가 되고 있다.
구체적인 제작전반을 지원하는 아트 인큐베이팅
두산아트센터는 2007년 이자람, 성기웅, 서재형-한아름, 추민주를 젊은 창작자로 선정해 지원을 시작했고, 그 결과 실험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이자람의 사천가>, 성기웅 연출의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서재형-한아름 콤비의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등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지난 20일 두산아트센터 A연습실에서는 아트 인큐베이팅의 일환인 ‘두산 아트랩’을 통해 추민주 연출의 신작 <무화과나무가 있는 집>의 독회가 열렸다. 2008년 뮤지컬 <젊음의 행진> 이후 2년만에 내놓은 이 작품은 1989년의 4개월을 그리며 역사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한지붕 세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냈다. “어릴적 무화과나무가 있던 집에서 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대본은 뮤지컬 <빨래>와 같이 유머 속에 삶을 향한 따뜻한 위로와 철학을 담는 추민주 작가 특유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1989년 6월 30일 임수경 방북사건부터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의 순간들은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촘촘히 살아났고, 예측 가능한 소재들이 산재해있지만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감정이입을 도왔다.
11월에 시작된 또 다른 인큐베이팅 프로젝트 ‘크리에이티브 마인즈’는 지원대상을 ‘뮤지컬’에 국한시켜 한 달에 한작품씩 공개리딩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7, 28일에는 <모비딕>에 이어 ‘크리에이티브 마인즈’의 두 번째 작품 <사랑을 포기한 남자>가 소개됐다.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집착과 분노, 슬픔을 담은 이 작품은 아카펠라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주목을 받은 뮤지컬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의 민준호 연출작. 뒤늦은 후회와 반성, 자신을 소중히 하라는 교훈까지 다소 평범한 내용과 결말을 담았지만 ‘꿈치료’라는 독특한 소재와 이별을 대하는 인물들의 보편적 정서, “하나의 배우”로 작용하는 영상처리로 발전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시장내 다양성을 가져올 창작
내년으로 이어지는 ‘두산 아트랩’은 연습실을 벗어나 공연장으로 옮겨간다. 돌아오는 1, 2월에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숲 속으로>와 지난 2009년 김무열, 한지상, 김대명의 ‘반상회’가 공연하기도 했던 에드워드 올비의 연극 < The Zoo Story > 등이 준비중이다. ‘크리에이티브 마인즈’ 역시 <중독>, <리심>, <풍월주> 등의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중독>은 창작뮤지컬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레뷔 형식을 띄고, 도서로도 발간된 <리심>은 조선 최초의 프랑스인과 결혼한 궁녀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창작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일련의 프로젝트는 공연장르를 발전가능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영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문제점은 산재해있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펼쳐진 시장 내 거품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고, 이와 같은 아트 인큐베이팅을 비롯해 많은 제작사에서도 새로운 신작 발굴을 게을리 하지 않아 2011년 한해 다양한 방식의 창작 신작이 소개될 예정이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파리의 연인>과 연극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부터 故 이영훈 작곡가의 곡들로 이루어진 주크박스 뮤지컬 <광화문 연가>와 해외 크리에이티브가 합세한 <천국의 눈물>까지. 다가오는 2011년 공연시장의 다양성과 실험정신이 창작 작품에서 시작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