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구미호는 한국의 여름을 담당해왔다. 무덤을 파헤치고 사람의 간을 꺼내드는 구미호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한편, 남자를 홀리는 팜므파탈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여우는 그저 그런 방식으로 재생산될 뿐이었다. 그러던 2010년 7월 우리 눈앞에 새로운 구미호가 당도했다. KBS <구미호 : 여우누이뎐>(이하 <구미호>)의 구미호는 팜므파탈도, 괴수도 아닌 그저 “어미”였을 뿐이었다. 그런 구미호가 딸을 구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에 가까운 이야기는 반인반수, 빙의 등의 독특한 설정과 맞물려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들을 위협하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을 통해 소수자와 계급을 향한 새로운 시각도 꺼내들 수 있었다. 7.8%에서 시작한 드라마가 16.1%로 종영했다는 것은 이 텍스트의 탄탄함을 증명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통해 가장 현재적이고 깊은 물음을 던진 <구미호>의 오선형, 정도윤 두 작가를 만나보았다.
지독한 모성과 부성을 보여주면서 <구미호>가 끝났다. 결말에 대한 다양한 설들이 있었는데 의외로 가장 간단한 결말이었다. 마무리 지은 소감이 어떤가.
오선형 : 굉장히 자연스럽고 뻔한 결말이다. 만신의 정체 등 몇 가지 반전들이 있었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들이었다. 특히 <구미호>는 연이와 구미호 둘이 있는 그림만으로도 참 예쁘다고 사람들이 좋아해주길 바랬는데, 마지막까지 아이들이 너무너무 연기를 잘해줬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겁이 나기도 했었다. 순위로 따지자면 우린 한참 뒤에 있는 것 같다. (웃음) 특히 만신의 경우엔 그의 말 한마디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믿을만한 파워를 가진 사람임에는 분명했지만 천호진 씨가 맡아 더욱 풍성해졌다. 너무 뻔해서 이런 얘기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데 좋은 스태프, 배우와 일하는 기쁨을 알려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뻔하지만 그 말밖에는 없다. 다들 너무 잘해줘서 너무 고맙고 너무 보고 싶다.
가장 친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구미호에게 모성을 부여해 올 상반기 등장한 드라마 중 가장 참신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구미호>는 2009년 극본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나.
정도윤 : 모두들 구미호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인간에게 배신당한 후 구미호가 어떻게 되었나 찾아보면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뒷이야기를 써보자, 하게 되었고 구미호 혼자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식구를 좀 붙여줘봤다. 그러면서 이야기에 살이 붙었다.
오선형 : 한국에서의 호러물은 장르 자체부터가 마이너하다. 하지만 <장화 홍련>이나 <여고괴담> 류의 작품들이 성공을 했고,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호러물을 보면 대체적으로 한이라 불리는 한국적 정서가 중요 장치로 사용됐다. 한국적으로 푼 호러일수록 보편적인 감정이 생겨나고 그 점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우리 작품에서는 그 부분이 모성이었던 거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 작품을 쓰게 되었나. 작업스타일도 궁금하다.
오선형 : 운명적으로? (웃음) 원래 둘 사이에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친구인 셈이다. 우연히 알게 돼서 친해졌고, 이렇게 같이 작품까지 쓰게 됐다. 둘 다 호러물을 좋아했고, 그래서 즉흥적이고 자연스럽게 <구미호>가 탄생했다. 그리고 작업에 있어서는 딱히 어떤 부분을 나눠서 하지 않고 이런 카페에 나와 의논하면서 모든 걸 같이 했다.
정도윤 :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각 나라에 내려오는 괴담이나 민간설화 같은 걸 좋아했었다. 엎어졌지만 예전에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작업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호러물에 눈을 떴다. (웃음) 몇 년 친하게 지내오면서 맞춰온 호흡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걸 같이 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대한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었지만, 캐릭터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비슷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잘 굴러갔다. 기본적으로 호러, 스릴러 장르물에 대한 이해도가 있기 때문에 아 하면 어하고 알아듣고 같이 갈 수 있었다.
공모전 수상 당시 제목이 <여우누이>라고 알고 있다. <구미호>를 앞에 붙인 건 좀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나.
오선형 : 미니시리즈가 되면서 대본에 좀 변화가 있었고, 그래서 처음엔 <구미호의 복수>라고 제목을 지었었다.
정도윤 : 그냥 <구미호>로만 하면 예전 단막극 이미지가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끼린 <구미호의 복수>가 쉽고 각인되기 쉬운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들은 다 깬다는 반응이더라. (웃음)
오선형 : 사내공모 비슷하게도 했다.
정도윤 : <아홉수의 비밀>, <사랑, 믿어서는 안 될 것> 이런 것들이 있었다. 입에 담기 어려운 제목들도 많았다. (웃음) 그걸 보면 <구미호의 복수>가 또 제일 나아보이고. 그런데 <구미호의 복수>라고 했으면 좀 후지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래서 구미호에 공모전 제목을 같이 붙였는데 끝나고 보니 이게 제일 맞는 것 같다.
모성이 주된 소재가 되면서 연이(김유정)와 초옥(서신애)의 무게중심이 높았고, 아이들이 누군가의 아역이 아닌 그 자체로 16부작을 이끌고 가는 격이었다는 점도 화제가 되었다.
정도윤 : 대부분 캐스팅에 참여하긴 했지만 성인 캐릭터 캐스팅은 연출부에 좀 더 맡긴 편이었다. 하지만 연이와 초옥이의 경우엔 아이들이 16부 미니시리즈를 이끌고 가는 게 처음이라서 (서)신애와 (김)유정이는 꼭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소원이 이루어졌다. 사실 평범한 신인데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잘해서 살았던 장면들이 많았다. 특히 신애는 성량이 너무 좋아서 리딩할때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웃음)
오선형 : 초반은 연이가 주인공, 후반부는 초옥이가 주인공이라는 기본 틀이 있었다. 그래서 배우 캐스팅에 있어서는 신애와 유정이가 우리의 답이었고, 그것 자체가 진리였다. (웃음) 그리고 유정이는 상대를 받쳐주는 연기를 참 잘한다. 유정이와 신애 둘 다 성향이 많이 다르면서도 잘한다. 그들이 너무 잘해줘서 열 스타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시청률에 있어서는 쉽지 않았다. 다양한 부분에서 시작부터 편견을 깨는 작업들이 필요했을 거다. 7.8%의 첫 방송 시청률을 받아들었을땐 어땠나.
오선형 :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처음부터 축제분위기였다. (웃음) 호러라는 장르,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라는 것 때문에 시청률에 대해서는 아예 맘을 비우고 있었다. 4~6% 정도? 그런데 점점 시청률이 오르고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우리로선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정도윤 : 워낙 대진운 자체가 짱짱했기 때문에 농담으로 “이승기 언제 나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렇게 착각을 해서라도 사람들이 좀 봐줬으면 했다. 그런데 결국 사람들이 연이랑 정규(이민호)를 보면서 “쟤들이 자라면 신민아랑 이승기가 되냐”고도 하더라. (웃음)
모성이라는 보편적 감성을 그렸지만, <구미호>는 호러물이었다. 언급했던 대로 마이너한 장르이고, 특히 한국은 장르물이 잘 구축되기 어려운 토양을 가지고 있다. <구미호> 집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
정도윤 : 제일 많이 나왔던 이야기가 짧게 가자는 거였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뻔한 구미호 얘기에 무슨 호러를 16부작이나 하냐는 반응들이었다. 그게 스릴러나 호러를 대하는 방식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사이즈는 16부가 가능했다. 그런데도 간간히 8부작이 좋았어, 라는 식의 반응들이 나오면 속이 상하긴 하더라. (웃음) 마지막 회가 끝나고 나서도 역시 재미는 있는데 12부 정도가 나았어, 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다. 하지만 만약 12부나 8부로 했으면 이정도 캐스팅을 할 수 없었고 정말 마이너해졌을거다.
오선형 :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건 공포와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음회를 보게 해야 하는 것. 그런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센 설정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스태프나 배우들에게 참 못된 짓을 많이 한 것 같다. (웃음) 어찌나 더러운 물들을 많이 맥였는지. 처음부터 우물에 집어넣고.
정도윤 : 유정이가 맨 처음으로 우물에 빠졌는데 너무 모범을 보여준 거지. (웃음) 참 미안하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윤두수(장현성)의 경우엔 감정적 혹사를 참 많이 당했다. 만신(천호진), 조현감(윤희석), 양부인(김정난) 전부가 그에게는 참 피곤했다. 그러니 구산댁(한은정)에게 의지할 수밖에. (웃음)
오선형 : 가장 믿지 않아야 되는 인물인데 믿어버린거지.
센 설정들에서 오는 몰입도가 강하긴 했다. 특히 작품 자체를 관통하는 반인반수나 빙의 등은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설정이었는데.
정도윤 : 윤두수의 연쇄살인, 빙의된 초옥이가 아버지인 윤두수에게 칼을 꽂는 장면도 그렇고 설정 자체들이 좀 세긴 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우려도 있어서 최대한 조심히 다뤘다. 그래서 그랬는지 다행히 장르물로 봐주면서 넘어간 것들이 많다. 온갖 마이너하고 호러적인 것들은 다 가지고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TV에서는 < M > 정도가 그런 설정들을 사용했었기 때문에 낯설고 장난스럽게 보일수도 있었다. 그래서 설정 하나를 넣을 때마다 수만 가지의 고민을 했다. 반인반수의 경우엔 유정이가 너무 잘해줘서 가짜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어미다”라는 구미호의 대사에서 이 작품이 모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중간 중간 소수자를 향한 시선도 돋보였다.
정도윤 : 많은 분들이 그 마이너리티에 대한 언급들을 해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친다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걸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1시간 동안 재밌었으면 됐지, 라는 생각이다. 특히 <구미호>는 장르 자체가 호러였기 때문에 너무 무섭지 않게 대중적이면서도 쉬운 이야기를 써야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특별히 마이너리티의 정서를 고집하진 않았다. 마이너리티와 관련된 기사들을 볼 때면 약간의 괴리감이 들기도 했었다. 우리가 이런 걸 썼었나 하고. (웃음) 그런데 감독님이나 우리가 태생적으로 이미 그런 시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드러났구나 싶더라.
특히 그 소수자를 향한 시선이 가장 잘 드러났던 것이 바로 윤두수의 캐릭터에서였다.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번민이 많은 윤두수의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오선형 : 참... 어려운 캐릭터였고, 우리 스스로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 캐릭터인데 100% 악인으로만 가기엔 너무 막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힘들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고뇌의 대마왕이 된 거지. (웃음)
정도윤 : 윤두수나 양부인은 약간의 이기심을 가진 보편적인 부모를 대변한다.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너무 악역으로만 그리면 4회 안에 연이가 죽고, 구미호의 복수가 6회에 시작, 빙의가 8회가 됐을 거다. 윤두수가 악역이 아니어서 연이의 반인반수 정체성도 더 많이 들어갈 수 있었고 이야기 자체가 더욱 풍부해졌다. 특히 구미호와의 멜로신 같은 경우엔 더욱 자제하면서 조금씩 줄타기를 해야 했다.
멜로는 왜 어려웠나.
정도윤 : 연이와 정규의 멜로는 어떻게든 굴러갔지만, 윤두수라는 캐릭터 자체가 너무 조심스러웠다. 구미호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드러나면 캐릭터가 공감을 얻기 힘들 것 같았다. 특히 윤두수와 구미호는 종을 초월한 멜로였는데 (웃음) 너무 밝혀도 캐릭터에 무게감이 없어지고, 구미호 역시 3달 있다가 떠날 사람인데 윤두수를 너무 좋아하면 그것도 너무 이상한 여자처럼 보일 것 같고. 수위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았다.
윤두수를 비롯해 정규, 조현감 등 남성캐릭터의 경우엔 구미호나 양부인에 비해 상당히 많이 흔들리는 인물로 그려졌었다.
정도윤 : 그렇게 보였다면 아마 이 작품이 모성을 다루기 때문이었을 거다.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 수는 없지만, 모성은 부성에 비해 앞뒤 안보고 스트레이트하게 간다. 그래서 좀 더 결단력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결국 <구미호>라는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
오선형 : 여전히 우리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스태프들은 열심히 만들고, 시청자들은 쉽고 재밌게 보는 작품이다. 재미가 없이 의미만 있고 가르치려고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힘없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드라마였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게 마지노선이다. 그렇지 않아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 드라마. 그 정도면 됐다.
작품을 마무리 지으면서 스스로 어떤 결론을 내렸나.
정도윤 : 우리는 애초에 기대치를 높게 잡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시청률이 조금씩 오르는걸 보면서 기분이 정말 좋았다. 1회의 장현성 씨와 15회의 장현성 씨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참 묘하다. 모든 배우들이 1회때보다 지치고 얼굴도 많이 상했지만 예뻐지고 잘생겨졌더라. 분위기가 근사해졌다. 대본의 결점을 배우의 연기와 연출로 잘 커버가 됐고, 텍스트 이상으로 너무 잘해줘서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시청률은 며느리도 모르는 건데 여기까지 온것만해도 행운이다. 이런 장르물이 언제 또 나올지 모르겠다. 호러로 16부작을 한다는 게 시작도, 성과를 내기도 힘든데 이만하면 괜찮았다고 한다. 장편 호러사극이라는 분야를 먼저 찜해놓은 느낌이 들어서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만족스럽다.
앞으로는 어떤 작품들을 쓰고 싶나.
오선형 : 다양한 장르를 하고 싶다. 지금은 일단 좀 쉬어야겠다. (웃음) 밀린 잠도 좀 자고, 병원도 좀 가고, 운동도 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