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지금이 낭떠러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마다 이유도 그에 따른 결과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벼랑 끝에 이르는 그 과정에 타인의 비난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큼은 비슷하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벼랑 끝에 선 한 인간을 다룬다.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안나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교계 사람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수군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 목소리로 “옳지 않아”를 외치고, 그를 향해 다수가 다가오며 숨통을 조인다. 안나에게 사선으로 쏟아지는 얇고 긴 조명은 비난의 화살을 시각적으로 재현해낸다. 2019년의 공연은 2018년의 초연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초연이 도덕적 잣대 위에서 흔들리는 안나를 그린다면, 2019년의 재연은 비난을 알고서도 행동하는 안나의 용기에 주목한다.
안나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발견되는 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다. 그는 공연이 시작되고 20분이 지날 때까지도 타인에 의해서만 소개된다. 스키바의 동생이자 카레닌의 아내. 사람들은 카레닌의 신분을 궁금해 하고, 안나의 등장에 ‘기품’이나 ‘허영심’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특히 사랑 없이 결혼한 카레닌은 “남편의 말을 끊”는다며 안나를 나무라고, 자신의 명예와 품위를 실추시킨다며 그의 행동을 통제한다. 안나가 집을 나간 후 카레닌은 기어이 이런 말을 뱉는다. “예의 없는 것.” ‘것’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카레닌은 안나를 자신의 소유물로만 여길 뿐 그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안나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브론스키 역시 명예가 주어지자 안나의 요청을 외면하고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는 금지된 사랑을 함께 선택했어도 정신적 폭력을 안나에게만 가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안나의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의상을 입고 비난의 한복판인 오페라극장에 가는 것처럼. 2019년의 <안나 카레니나>는 견고한 가부장적 사회 속 억압된 여성이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찾는 과정을 담으려 애쓴다. 때문에 안나가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엔딩도 다르게 해석된다. 초연의 엔딩은 사랑에 실패한 여성의 극단적 선택처럼 느껴졌지만, 2019년의 엔딩은 안나가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에 가깝다. 누군가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죽음.
이 변화를 담아내 객석에 전달하는 것은 온전히 배우의 몫이다. 배우 윤공주는 “남성우월주의가 강했던 시대를 살면서도 사랑을 추구하고 자신의 삶을 존중한 안나의 용기”에 주목한다. 흔들림 없이 진성으로 뿜어내는 노래들이 안나의 기개를 그려낸다. 겹겹으로 둘러싸인 의상 속에 가려진 가녀린 몸은 수많은 비난에도 홀로 버티는 한 인간의 애처로움과 강인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또렷한 가사 전달로 드라마를 견인하는 것은 물론이다. 안나의 순간들이 모여 윤공주가 만들어내는 엔딩은 그 어떤 장면보다도 그를 가장 크고 강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우리는 이를 통해 ‘불륜’이라는 단어 뒤에 가려진 안나의 절규를 듣고, 작품을 견인하는 주연배우로서의 윤공주를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