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키사라기 미키짱>, 배우 김한 (텐아시아)

“사실 저는 진짜 오타쿠거든요.” 지난 5월에 있었던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 제작발표회에서 김한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로 자신을 소개했다. 제작발표회 전 날도 애니메이션을 보고 왔고, <노다메 칸타빌레>로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오타쿠를 다루는 작품의 배우가 진짜 오타쿠라니. 그것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이유다. 하지만 ‘오타쿠’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오해되듯,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는 틀을 벗겨낸 김한은 훨씬 더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수다일 줄 알았던 그와의 인터뷰는 오히려 인생 상담에 더욱 가까웠고, 오타쿠야말로 자신에게 솔직한 자의 다른 이름임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타인의 삶과 개성을 존중하게 되었다는, <키사라기 미키짱>의 절대지존 이에모토 김한을 소개한다.
두 달 사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김한: 안 그렇게 생겼는데 예민해서, 좀 빠진다. 평소 작품 들어가면 잘 자고 밥도 잘 먹는데 <키사라기 미키짱>은 자꾸 생각이 난다. 특히 공연한 날에는 머릿속으로 계속 스케치를 한다. 이게 좀 힘들었나, 별로였나, 내가 관객이었으면 이런 게 좀 싫겠구나, 좋았겠구나, 라는 식으로. 생각이 많아지니 예민해지고, 그러면서 살이 빠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63kg까지 빼서 연예인 몸을 만들어야겠다. 하하.
몸무게 변화가 눈에 확 보일만큼 이 작품에 많이 빠져있다는 느낌이 든다.
김한: 못한다고 열심히 안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웃음) 영화를 보면서 연극으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에모토 역을 하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오구리 슌이 맡았던 캐릭터였다. 언감생심이었지. 한국에서도 공연을 하게 된다면 쟁쟁한 배우들이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로또 맞은 기분이다. 그래서 너무 즐겁고 감사하다. 나는 연기가 정말로 좋아진 게 얼마 안 됐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고, 사람이 연애할 때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잠도 못자고 그러지 않나.
1996년에 데뷔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연기가 좋아진 게 얼마 안 됐다고?
김한: 고교비평준화지역에 살았는데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다. 좋은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나니 의사되라, 고위 공무원이 되면 어떻겠냐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회의가 느껴졌다. 그래서 일부러 반항하는 마음으로 딴따라가 되어보자고 해서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 좋은 거다. 막연히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연출로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좋아서 하던 게 일이 되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무슨 문제?
김한: 우연찮게 어릴 때 방송, 영화를 시작하면서 2~3년은 잘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1년에 광고를 20여 편씩도 찍었는데 그러다보니 너무 건방졌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그만큼의 좋아하는 댓가를 치러야 하는데 난 아무런 댓가 없이, 노력 없이 지나와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댓가를 치르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졌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연기를 좋아한다고 최면을 걸면서 살았다. 이걸 떠나면 할 일이 없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보험을 팔겠나 차를 팔겠나. 그렇게 변두리에서 지내면서 연기를 동경만 하면서 아무것도 안한 채 지낸 세월이 길었다.
막연히 좋아서 시작했던 일들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 잘하고 싶다는 의지 때문은 아니었을까?
김한: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점 더 술만 먹고 놀게 됐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서 너무 좋은데, 내가 자신이 없어지는 순간이 생기고 그래서 자꾸 도망가게 되는.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정면돌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얼마 안됐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김한: 스물일곱, 여덟 살 때였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너무너무 힘들고, 우울하고, 즐거운 것만 보고 싶은데 즐거운 일이 없었다. 그 당시 판도라tv에서 옛날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는데 마음에 위로를 많이 받았다. 원래 과장된 것을 싫어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당시엔 냉정한 현실에 비해 과장된 애니메이션이 많은 도움이 됐다. <노다메 칸타빌레>의 치아키는 천재지만 비행기를 못 탄다. 지휘를 배우려면 외국에 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럴 수 없는거지. 그래서 치아키는 일본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세상탓 하지 말고 여기서 열심히 하자, 쓰레기더미에서 열심히 하다보면 재활용 쓰레기라도 되지 않겠나. 그래서 작년부터 일부러 건물 청소도 하고, 유리도 닦고 노가다도 하면서 육체노동을 시작했다. 육체노동은 땀에 대한 보람은 있었지만 즐겁진 않았었다. 그때 내가 하고 있는 연기가 얼마나 좋은 건지 알았고, 연기라는 일자체가 너무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결국 노다메의 도움으로 치아키가 유럽에 갈 수 있게 되는데, 그렇다면 주변에 노다메 같은 사람들도 있었겠다.
김한: 이 바닥이라고 하면 웃기지만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가볍고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나도 그랬고. 하지만 지금 내 주변 사람들은 전부 나의 최하를 본 사람들뿐이다. 대학 선배 감독님이 한 분 계시는데, 돈 없을 때 형 나 배고파 그러면 본인도 없으면서 집에 있는 쌀을 라면봉지에 담아서 주고 그랬다. 그리고 엄마가 기도도 많이 해주셨고.
사실 본인의 미키짱으로 <마크로스>의 린 민메이를 언급하길래, 심층의 마니아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단기간에 빠져들었다.
김한: 기미는 어릴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엄마가 얘기해준 건데, 학교 갔다 와서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잠깐” 이러고 집에 들어와서 <모래요정 바람돌이>, <이상한 나라의 폴> 이런 거 보고 다시 나가 놀고 그랬다고 하시더라. 5년 전부터 열심히 보기 시작했지만, 광적으로 시간이 나기만 하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봤다. 뭐든지 끝이 안 나면 잠을 못자는 성격이라 <내일의 죠>는 TV판이랑 OVA판까지 2시간씩 자면서 4~5일만에 다 봤다. 지금까지 <내일의 죠>는 다섯 번을 봤고,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유니클로 한정판 티셔츠까지 구했다. 하하
며칠 전에는 <원피스>의 루피가 그려진 티셔츠에 루피모자까지 쓰고 극장에 왔다던데. (웃음)
김한: 사실 물건을 많이 사고 그런 건 아니지만, 뭐, 자랑스럽다. (웃음)
그래서인지 공연을 보다보면, 저건 진짜 경험한 자의 모습이구나 싶을 때가 자주 있었다. 예를 들면 보호와 소유욕으로 대변되는, 미키를 향한 이중 잣대 같은 것들. 본인의 모습과 비슷해서 편한만큼 힘든 점도 있나.
김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목소리가 이상하든 걷는 폼이 이상하든 살아있으니까 믿음이 가고 뭘 해도 진실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지문이 묻지 않게 손바닥으로 물건을 집거나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지만, 시간상의 문제도 있고 일본에서 온 문화라 과한 면이 있어서 장갑을 끼는 방식 등으로 변화된 부분들이 있다. 특히 이 작품은 템포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손 디테일 1, 2초 때문에 관객들이 다른 걸 보면 극에 대한 손해다.
템포만큼 멤버간의 치고 받는 호흡도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다. 미키팀에서 스네이크 역을 맡은 박정민의 증언에 따르면 막내를 자처하고 있다고 하던데.
김한: 우리팀은 살아있는 유기체다. 그래서 진화도 했다가 퇴화도 했다가 상처도 입는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서 자연적으로 치유되고 발전한다. 난 <키사라기 미키짱>이 너무 좋다. 어렸을 때 진짜 싫었던 사람들이 나이 많은 걸로 자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형으로서, 동생으로서 믿고 싶은 거보다는 동료로서 믿고 싶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박)정민이도 당연히 나서서 도와줄거고, 정민이가 10개를 준비했을 때 내가 1, 2개를 해주면 걔도 편해지니까. 형님들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에 김원해 선배랑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 연극은 <무한도전>이라고. 스네이크는 노홍철, 이에모토는 유재석, 기무라 타쿠야는 박명수, 딸기소녀는 정준하, 야스오는 길. <무한도전> 멤버들이랑 우리 캐릭터가 많이 비슷하다.
정형돈은?
김한: 너무 존재감이 커서 지금 정형돈이 들어오면 안 된다! (웃음)
<무한도전>에 대입할 수 있을만큼 캐릭터에 명확한 성격들이 부여되어 있다. 하지만 이에모토는 눈에 띄는 성격 대신 균형감이 중요한 캐릭터고, 그렇기 때문에 연기하게 더욱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김한: 이에모토는 후반부의 반전을 위해 초반 자락을 깔아주고, 일반 관객들의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는 캐릭터다. 그래서 연극이 잘 안 풀릴 때는 <무한도전>을 본다. 유재석 선배의 경우엔 절대 자기 것을 안하고 다른 멤버들을 밀어준다. 내 것을 하려고 하는 순간 무너진다는 것을 느끼고 이에모토에 많이 적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은 다 부족하다. 매일매일 미키짱한테 배우는 중이다. 연기를 잘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연기 뿐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일이라는 것이 테크닉은 금세 익힐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거기에 어떻게 자기색을 더하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정답이라는 건 없는 것 같다.
김한: 잉베이 맘스틴이라는 기타리스트는 속주의 대가였는데, 이분이 나이를 먹으면서 속주를 포기한다. 에릭 클랩튼도 엄청난 기교의 달인이었는데, ‘Tears in Heaven’을 보면 또 아니다. 피카소도 나중에 기교를 버리고. 잘 모르기는 하지만 예술이라는 게 기교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나가다 폐지 줍는 할머니가 소리 지르는 게 더 무섭고, 꼬마가 우는 게 더 정서적으로 오는 것처럼. 연기가 구도의 과정이랑 비슷하다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다.
<키사라기 미키짱>도 그리고 스스로 오타쿠라고 밝히는 당신도 굉장히 즐겁고 밝고 건강하다. 하지만 ‘오타쿠’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때가 더 많지 않나.
김한: 운동을 좋아해서 킥복싱을 보러 태국에 간 적이 있다. 한 서양인이 내가 일본인인줄 알고 일어로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오타쿠를 연구하는 오타쿠였다. 일본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게 천구백칠십몇년도의 교복이야, 넌 모르지? 이러면서. (웃음) 사실 어떤 문제이건 깊게 알면 다 통하는 건데, 겉만 보고서 싫어한다. 마니아랑 오타쿠랑 다를 게 뭐가 있나. 마니아 하면 괜히 있어 보이고, 오타쿠는 음지에 있는 사람 같지만 그건 아니다. 지금은 오타쿠가 문화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아키하바라는 오타쿠가 먹여 살린다는 말도 있고, 일본 경제의 3분의 1을 그들이 책임진다는 말도 있다. 멋진 아저씨가 코트 쫙 빼입고 와도 코트 벗으면 세일러복이 있는 게 일본이다. 우리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만, 일본은 각자의 인생과 개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오타쿠 문화가 더 발전한 거라고 본다.
굉장히 행복해보인다. (웃음)
김한: 아, 저는. 제가 오타쿠니까! (웃음) 남에게 피해주는 건 아니니까. 세상에 틀린 게 어딨나, 다른거지. 부모님 돈으로 50만원짜리 피규어 사는 건 문제지만, 자기 돈 벌어서 사면 된다. (웃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스스로 달라진 부분들이 있나.
김한: 내 일생에 애니메이션이 고마운 치유제가 됐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웃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로 인해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가치관이 달라졌다. 고향이 경상도라서 권위적인 부분이 있었고, 후배들에게도 무섭게 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전엔 연애를 해도 이런걸로 차이기도 많이 차이고, 차기도 많이 찼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별 게 아닌 사람인데 왜 남의 귀한 자식한테 상처를 줘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물론 100% 다 변한 건 아니고 지금도 이기적일수 있지만 최대한 그렇게 안하려고 노력한다. 자기만 편하면 땡이 아니니까.
연극 속 인물들은 미키가 좋아하니까 됐어, 라는 마음으로 더 높은 곳을 보지 않는다.
김한: 내가 좋은 게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결혼해서 자식 낳고 걔가 1등을 하면 부모 입장인 내가 좋은거지 걔가 좋은 건 아닐 수도 있다. 게 알레르기 있는 사람에게 간장게장 비싼 거 사준다고 즐거운 게 아니니까. 어느 순간 강요하고 싶지 않아졌다.
바닥을 본만큼 그것을 돌파하려는 욕심이 더 크게 보일텐데 해탈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그런 마인드가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나보다.
김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어가 ‘자연스럽고 솔직하게’라는 뜻의 스나오니(素直に)다. 어릴때는 너무너무 잘되고 싶어서 욕심도 많이 부리고, 상처도 많이 주고 받았는데 내 인생이 망가지는 것 같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 되는거지 지위 같은 건 상관없다. 그 사람이 잘해서 되는 것도 있지만, 운이 좋을 수도 있고, 로또에 당첨될 수도 있다. 재혼으로 빌게이츠한데 시집갈 수도 있는거고. 태어난 이상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나는 연기를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 욕심 부리고 연기만 잘해서 주위에 사람 다 없어지는 것보다는 10년 걸려도 완주해내고 싶다. 마라톤은 완주에 의미가 있지 1등 해봤자 노화 빨리 오고 살만 팍 찐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