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다 되는 옥주현, Like
뮤지컬 <마타하리>에서 가장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은 옥주현이다. 신비로운 인도풍의 춤을 추는 옥주현, 재즈를 부르는 옥주현, 화려한 의상을 입고 아름다운 몸매를 뽐내는 옥주현, 사랑 앞에서 두려움 없는 옥주현, 여장부 같은 옥주현, 눈물을 흘리는 옥주현. <마타하리>는 옥주현이 자신의 장기를 모두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한 무대처럼 보인다. 지난 11년간의 뮤지컬 활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 대신 오해로 점철된 마타하리라는 캐릭터는 18년간 대중에게 노출되어 왔던 실제 옥주현의 삶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공주 아니면 창녀’라는 우스갯소리의 시장 안에서도 <엘리자벳>으로 우아함을, <시카고>로 섹시함을, <아가씨와 건달들>로 발랄함을, <몬테크리스토>로 청순함과 단단함을 보여준 그는 성녀 혹은 창녀 모두를 소화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다양함’을 콘셉트로 내세운 듯한 마타하리의 노래들은 옥주현을 위해 작곡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은 깊은 저음부터 머리를 울리는 고음까지 옥주현의 넓은 음역대를 고루 사용하고, 발라드부터 록·재즈에 이르기까지 발성과 톤·장르에서도 옥주현의 최대치를 끌어낸다. 그 결과 관객들은 옥주현의 재능과 매력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빠르고 화려하게 변신하는 무대와 착시를 이용한 독특한 연출, 밸리댄스부터 탱고·캉캉에 이르는 다양한 안무 역시 옥주현의 독무대에 힘을 싣는다.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을 안 주네”라는 가사는 곧 <마타하리>를 정의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평면적인 인물 묘사, Dislike
옥주현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뮤지컬은 마타하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극에서는 그의 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마타하리를 ‘정치적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의 삶을 “한편의 공연처럼” 보여주고자 하는 기획의도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도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파이’라는 매력적인 소재에도 마타하리는 누군가에 의해 재단되고 평가받는 도구에 머물고, 상처받은 삶을 일으키기 위해 스스로 무희를 선택하고 일련의 인정을 받았음에도 자신에게 벌어진 많은 문제를 ‘사랑’으로 봉합한다는 식의 결말은 <마타하리>가 철저히 남성의 시각으로 쓰여진 극임을 스스로 밝히는 셈이다. 여성을 성적으로 이용한 남성에게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라는 변명거리를 주지만, 마가레타 거트루드 젤르가 마타하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고단한 삶은 쉽게 정리된다. 극 초반 “안 해. 남편에 복종하는 삶”이라 노래하고 “여장부” 소리를 듣던 마타하리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내 길은 오직 하나 뿐. 날 바라보는 그의 품 안에”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캐릭터의 성장이 아닌 퇴보로 보일 정도다. 마타하리처럼 무례한 남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상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지나간 실패를 극복하고 자신을 회복하는 일은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이건 사랑이 문제라는 얘기가 아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에서도 결국에는 ‘가련한 여자’밖에 볼 수 없다면, 과연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여성캐릭터를 어디서 만날 수 있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