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전과] chapter.4 <쓰릴 미> (텐아시아)

단원의 특징 ① 1924년 시카고에서 발생한 아동유괴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지난 2003년에 제작된 2인극 뮤지컬. 극작, 작곡, 연출을 맡은 스티븐 돌기노프는 2005년 두 번째 작업에서 네이슨 역으로 직접 출연하기까지 했다. ② 범죄와 동성애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망한 이 작품은 2007년 한국초연 된 이후 매년 재공연 되고 있으며 김재범, 정상윤, 전성우, 손승원, 장현덕, 김성일, 이정훈으로 구성된 2011년 <쓰릴 미>가 충무아트홀 블랙에서 2월 26일까지 공연된다.
날짜를 세어봅시다: 99년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차드 롭이 실제로 선고받은 형기. 두 사람은 살인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유괴에 대해서는 99년형을 받았다. 시카고에 단 3개뿐이던 안경을 쓸 만큼 풍족했던 집안과 열다섯에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두뇌를 지닌 둘에게 세상은 거칠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쉽게 얻었고, 미성숙했지만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그들을 자유롭게 했다. 특히 리차드는 인류의 지배자가 되는 니체의 ‘초인론’을 탐닉하며 새로운 자극을 원했는데, 그 자극은 네이슨과 함께 한 다양한 범죄로 이어졌다. 방화, 강도에 이어 결국 1924년에는 리차드의 먼 친척이었던 바비를 유괴해 잔인하게 살인하기에 이른다. 열여덟(리차드), 열아홉(네이슨)의 두 소년이 특별한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과 그들의 변호사 찰스 대로우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최후변론으로 전 세계가 이 사건을 주목했다.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여러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1948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로프>로 제작되었고, 2003년에는 “이상하게 비틀어진 관계”에 관심을 갖던 스티브 돌기노프에 의해 뮤지컬 <쓰릴 미>로 탄생한다.
노래를 배워봅시다: ‘Nothing Like a Fire’
극중 ‘나’(이하 네이슨)와 ‘그’(이하 리차드)가 방화를 저지른 후 부르는 곡. 리차드는 타오르는 불에 흥분하고, 네이슨은 범죄에 도취된 리차드의 모습에 흥분한다. 이 곡을 통해 서로가 원하는 것이 톱니바퀴처럼 꼭 들어맞는 둘의 캐릭터와 관계가 처음으로 노출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불리는 ‘타오르는 불꽃’, ‘유혹하네’ 등의 가사와 맞닿지 않고 엇갈려버리는 시선은 그런 둘의 동상이몽을 잘 표현해낸다. 뮤지컬은 화려하다는 공식을 깨뜨린 <쓰릴 미>는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 대신 피아노 한 대로 극을 진행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Nothing Like a Fire’에서 과격한 ‘Superior’로 이어지고, ‘Way Too Far’의 슬픔과 ‘Afraid’의 불안까지도 그려낸다. 특히 반복적인 멜로디로 음악자체에 귀를 기울이게 해 관객의 집중을 돕고, 음울한 느낌의 낮은 음들은 스릴러물로서의 공포감 조성에도 탁월하다.
캐스팅보드를 확인해봅시다: 김무열
“전투력의 50%를 담당하고 있”는 <쓰릴 미>의 대표 인물. 당당함과 불안함을 넘나드는 연기와 훈훈한 ‘수트간지’, 찰진 욕설로 2007, 2008, 2010년 <쓰릴 미>에서 리차드 역을 맡았다. 독특한 소재,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한 피아노의 <쓰릴 미>는 2007년 등장과 함께 화제의 중심에 섰다. 상대적으로 단출한 무대와 음악은 배우들에게 더 강한 연기력을 필요로 했고, 이에 <쓰릴 미> 출연은 곧 연기력 검증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총 23명의 배우들이 거쳐 간 이 무대에서 초연 당시 네이슨을 맡은 류정한은 가창력이 아닌 연기력으로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상대역이었던 김무열은 이 작품을 통해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2009, 2010년의 정상윤과 김재범은 스무 살의 청년과 쉰 넷의 중년 캐릭터를 넘나들며 예민하고 섬세한 네이슨을 디테일이 강한 연기로 승화시키며 자신들의 이름을 더욱 공고히 했다. 영화 <페이스 메이커>의 최재웅과 이율, <너는 펫>의 강하늘, KBS <난폭한 로맨스>의 강동호 역시 <쓰릴 미> 출신.
친구와 작성해봅시다: 계약서
둘 사이에 존재하는 파워의 이동을 가져오는 결정적 단서. 이 계약서를 통해 두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리차드는 더 높은 차원의 범죄를, 네이슨은 그런 리차드를 더 소유하기를 원한다. 유약하게만 보이던 네이슨이 강하게 그를 리드하는 것도, 당당해보이던 리차드가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되는 것도 모두 계약서로 인해 생겨난 변화다. 이는 “둘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 통제가 안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는 스티븐 돌기노프의 연출의도가 반영된 장면들이다. 이 과정에서 극 내내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던 리차드의 내면과 네이슨의 반전을 목도하는 순간 관객들의 이성은 마비된다. 특히 반전의 단서들은 여러 소품 외에도 찰나의 순간에 반짝이는 눈빛이나 계약서를 작성하는 빠른 손놀림,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끈 쥔 주먹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페어마다 다른 해석과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두 배우의 화학작용은 결국 재관람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심화학습: <쓰릴 미> 무기한 보이콧 사태
2011년 <쓰릴 미>의 노승희 연출가가 트위터에서 반복관람 관객을 ‘크레이지’라 지칭하며 문제가 시작됐다. 현재 다수의 <쓰릴 미> 마니아들은 연출가와 제작사의 사과를 요구하며 관련 사이트를 만들고, 1인 시위를 하며, <쓰릴 미>를 비롯한 <넥스트 투 노멀>과 <김종욱 찾기> 등 뮤지컬해븐의 작품에 보이콧을 하고 있다. <쓰릴 미>는 2010년 한해 2회 이상 재관람한 관객이 2000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마니아를 거느린 작품으로, 제작사에서도 재관람 할인은 물론 실제 현장을 답사하는 <쓰릴 미> 투어나 사진전, 뮤지컬해븐의 밤 등의 행사를 가져왔다. 박용호 대표 역시 “작품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봐주는 관객들이 이 작품을 계속 올리는 의미와 이유”라는 말로 재공연을 진행해왔기 때문에 이번 사태에 대한 관객의 분노는 더욱 높아져만 가고 있다.
<쓰릴 미>는 연극성이 강한만큼 연출의 색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지난 5년간 연출가 김달중, 이동선, 이종석이 참여해 관객들로부터 다양한 성적표를 받았지만 관객을 향한 직접 발언은 드물었다. 이번 노승희 연출가의 일방적인 관객모독성 발언과 다양한 의견을 수용치 못하는 자세는 충분히 문제로 지적될만하다. 하지만 배우들마저 “관객들만의 <쓰릴 미>가 있는 것 같다”고 언급하는 관극태도 역시 이를 계기로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쓰릴 미> 사태는 단순히 한 연출가와 관객의 싸움이 아니라, 그동안 상업적 논란과 예술적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뮤지컬 시장 자체의 다양한 문제들이 뭉쳐 수면 위로 올라온 실타래다. 이 실타래가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시장은 다른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쓰릴 미>, 역시 여러모로 뮤지컬의 신화다.
사진제공. 뮤지컬해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