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영상에서 시작하자. 누가 보이는가. 그 옛날 SBS <카이스트>의 능청스러운 만수? MBC <개인의 취향>의 이민호 선배? 혹은 예능프로그램에서 오랜 연인을 향해 깜짝 프로포즈를 하던 남자?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이자 대중에게 ‘주인공 친구’로 각인되어 온 정성화다. 배우는 수많은 캐릭터의 삶을 살아낸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연쇄살인마가 되어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 그간 ‘주인공 친구’였던 그가 지난 2010년 <영웅>으로 제 4회 더뮤지컬어워즈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무대에 선지 8년 만의 일이었다. 한 분야에서 인정받기까지의 지난한 세월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정성화는 좀 다르다. 주연이냐 조연이냐 혹은 그가 업계에서 인정받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니라, 그가 자유로운가 아닌가라는 점 때문에.
친구의 반격, 뮤지컬에서 시작되다
정성화는 개그맨이었다. 그래서 출신에 기인한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늘 주인공 친구였다. 직업의 소중함 대신 자신의 불운을 더 먼저 떠올렸던 20대. 하지만 “박수를 쳐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관객의 박수를 받고난 후 그는 삶의 의미를 되찾았고, 자신을 둘러싼 선입견을 깨는 조각을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조승우와 함께 2007년 <맨 오브 라만차>(이하 <라만차>)의 돈키호테에 캐스팅되며 그동안 축척된 굳은 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해, 조승우는 시상대 위에서 함께 노미네이트되었던 정성화를 향해 “이 상은 형 것”이라 말했다. 친구의 반격이 시작된 셈이다.
불가능한 꿈을 향한 용기와 전진은 낮은 베이스의 울림을 타고 관객의 가슴에 단도로 꽂혔다. 그 누구도 정성화에게서 상상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특히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모습을 연모하겠나이다”를 읊조리는 돈키호테는 그동안 그가 걸어온 길과 중첩되며 정성화의 미래를 주목하게 했다. 그래서 그에게 가능성의 날개를 달아준 것이 <라만차>였다면, 이후 그 날개로 날아오른 것이 바로 <영웅>이다. 상대적으로 더 “토종스러운”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정성화의 안중근은 불안에 흔들렸고 선택에 머뭇거렸다. 그래서 안중근은 무거운 독립투사의 짐을 벗고 끊임없이 번뇌하는 서른한 살의 청년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웅>을 정성화의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다.
인정받는 뮤지컬배우 그 이후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제 아무리 수상소감이 화제를 모으고 연일 1000명의 기립박수를 받는다 해도, 무대를 떠나는 순간 정성화는 “여전히 주인공 회사 직원 중 가장 웃긴 사람”일 뿐이다. 최근작 <개인의 취향>에서도 그는 섬세한 손끝처리와 함께 “언니라 불러도 돼요?”라며 게이인 척 연기하던 순간으로 기억됐다. 개봉을 앞둔 <위험한 상견례> 역시 헤어롤을 말고 딸기무늬 원피스를 입은 컷으로 ‘순정만화에 빠져있는 4차원’ 캐릭터를 연기한다. ‘명품 조연’이라는 수식어를 달수도 있겠다. 하지만 쉬어가는 타이밍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는 그의 수많은 가능성을 좀먹었다. 그래서 그가 뮤지컬배우들의 드라마 진출에 대해 “나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큰 역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화는 카메오든 단역이든 가리지 않고 출연한다. 배우에게 필요한 것을 알기 위해 시나리오를 써보고,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를 인정하고, 어쨌든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인드로 끝까지 간다. 그리고 가다 보면 KBS <드라마 스페셜>의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저승사자가 온다’와 같이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전시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동안 무대에서의 삶도 늘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안정된 발성과 정확한 딕션이라는 기본기 위에 자신의 색을 덧칠해온 결과 그는 희극과 비극 모두에서 인정받는 뮤지컬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래 없이 오롯이 연기로만 평가될 <거미여인>은 그의 배우 인생에서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새로운 국면을 가져올 수도, 혹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조각은, 정으로 수만 번을 깨는 자만이 완성할 수 있다.
정성화는 사진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흥얼거렸다. 인터뷰 며칠 전에 본 “혼이 느껴지는 공연에 혼나는 느낌”이라는 한 예능프로그램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가사는 묘하게 그가 지금 연기 중인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이하 <거미여인>)의 몰리나를 떠오르게 한다. 여자만 좋아하는 이성애자를 사랑하는 남자 혹은 그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그에게 ‘바람이 분다’는 제법 잘 어울리는 선곡이다. 정성화의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인터뷰 내내 무의식적으로 나온 손동작들은 누가 봐도 몰리나였다. 무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지 9년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인정도 받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연극무대로, 초심으로 내려온 남자. 그래서 정성화를 만나 몰리나를, 뮤지컬을, 그리고 상대적으로 기회의 폭이 좁은 드라마에 대해 물었다.
MBC <개인의 취향>의 게이인 척 연기하던 상준이 진짜 게이가 되어 돌아왔다.
정성화: 몰리나가 여성스럽게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내가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웃음)
2003년 공연한 <아일랜드>에 이어 9년 만에 하는 연극이다. 2인극과 게이 캐릭터, 쉽지 않은 선택인데 시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정성화: <헤드윅>도 마찬가지겠지만 <거미여인>도 게이들이 겪고 있는 콤플렉스나 어려움을 많이 표현해줘야 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굳이 목소리나 다른 설정들이 꼭 여자 같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고, 할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을 먹게 됐다. 오히려 여자다운 외모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감성적으로 더 많은 감동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이이지만 여자만 좋아하는 이성애자를 좋아하는 몰리나를 통해 불가능을 계속 고집하며 생기는 페이소스 같은 걸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몰리나는 감옥에서 발렌틴에게 영화 얘기를 해주는데,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이 영화 얘기를 디테일하게 잘 표현할 수만 있다면 정말 재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공연을 하다 보니 영화 얘기가 다는 아니라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스스로 즐기면서 관객들에게 눈빛이나 동선, 말투로 그걸 잘 펼쳐주기만 한다면 나한테 많은 공부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것은 들려주는 것으로 그림을 보여준다는 개념인가?
정성화: 나는 그렇다. 무대에서 배우가 그걸 보면 관객도 그걸 보게 된다. 보는 척하면 관객도 못 본다. 새장 속에서 새가 물을 홀짝거리고 있다는 것을 디테일하게 보고 있어야 관객들도 그 상황을 보게 되는 거다. 그 사람의 눈을 통해서.
그렇게 시작한 연극이 한 달을 넘겼다. 2주전쯤 “완벽하게 몰리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날이라 기뻐서” 이지나 연출을 찾아갔다고 하던데.
정성화: 사실은 조금 뭔가 알겠다, 라는 느낌이었는데 뭔가 의문점이 남아서 여쭤보러 간 거였다. 집에 가는 길에 “선생님 안 주무시면 간단하게 맥주나 한잔 하시죠”라고 해서 (웃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하면서 헷갈렸던 부분들을 명확하게 하고 왔다.
어떤 부분이 헷갈렸던 건가.
정성화: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언제부터 사랑을 느끼게 되는지,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작전을 거는데 그것을 통해 몰리나가 얻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작전을 걸면서 몰리나가 언제부터 후회막급한 상황이 되는지에 대해 여쭤봤다.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본격적으로 작전을 걸면서 이 남자와 헤어진다는 것을 피부로 체험하게 되고, 그때서야 자신의 사랑을 자각하는 거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사랑하고 있었구나, 이 남자와 함께 얘기했던 영화나 추억들이 나를 여자로 만들어주는구나 라고. 몰리나의 눈물은 그 남자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 부분부터 작전을 걸면서도 관객들에게 후회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선생님의 명쾌한 얘기 이후 훨씬 밀도가 좋아졌다. 배우들 간의 호흡이 완전히 맞기 시작한 시기인 것 같기도 하고.
2인극은 핑퐁게임처럼 두 사람의 합이 가장 중요하다. 두 발렌틴과의 연기 호흡은 어떤가.
정성화: (최)재웅이는 메인페어로 짜인 경우라서 합이나 호흡들이 이미 다 맞아왔고, 지금은 여기서 뭔가 더 찾을 수 있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중이다. 연출라인이나 동선을 헤치지 않으면서 눈빛 하나만으로 변화하는 것들을 맞춰나가는 재미가 있다. 굉장히 능수능란하고 멋진 배우다. (김)승대 같은 경우는 이벤트 페어이기 때문에 긴장도 많이 하게 되는데 의외로 강단 있고 좋은 연기를 하더라.
확실히 2인극 무대에서는 배우들이 실제로 공사구분 없이 얼마나 가깝게 지냈느냐가 연기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정성화: 작품을 선택할 때 일단 그 작품에 내가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가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동료애도 크게 작용한다. 나는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같이 공연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는 제작자들이 좀 싫어하는 부분이 있다. 정성화랑 작업하면 무조건 MT를 가야하니까. 허허허. 제작사에서 안보내주면 내 돈하고 어디서 협찬을 끌어와서라도 MT는 꼭 간다. 후배들에게 얘기해줄 거 해주고, 선배들한테는 들을 거 듣고 하면서 작품 자체가 딴딴하게 조여진다. 단지 그건 작품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하나의 추억이기도 하니까. 인간사에 충실한 것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동료애는.
공교롭게도 <아일랜드>와 <거미여인>은 비슷한 구석들이 있다. 특히 두 작품 모두 정치적 상황들이 보이는데, 몰리나는 게릴라 발렌틴에 비해 정치에 무관심한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인 만큼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췄나.
정성화: <아일랜드>는 정치색이라는 걸 입 밖으로 드러낸다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현재의 삶을 비꼬는 작품이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거미여인>에서의 정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상황이나 사조로도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인간의 관계다.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지만 둘의 관계가 애절하고 진실하다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그런 쪽으로 많이 치우쳐있지 않나 싶다. 이지나 선생님도 그런 쪽으로 해석을 하신 것 같고.
혹시 원작소설은 봤나?
정성화: 원작소설은 안 보고 영화만 봤는데, 영화를 봤을 때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고 느꼈다. 그런데 책을 보면 또 아니라고 하시더라. 연출의도가 있을 텐데 소설을 보게 된다면 헷갈릴 것 같았고, 나도 연기하면서 함정에 빠질 것 같았다. 게으르기도 하고. (웃음)
배우는 캐릭터의 삶을 사는 직업이다. 몰리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가.
정성화: 몰리나는 굉장히 힘들다.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이거 끝나고 나면 한 달간은 몰리나에 시달릴 것 같다. 술자리나 사람들한테 얘기할 때면 자꾸 몰리나가 나온다. 지금 말하면서도 그렇고. 다른 작품 할 때 해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오래할 작품은 아니구나 싶다. (웃음)
동성애자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했는데, 그 안에서도 일련의 정형적인 이미지로 도식화되어왔다. 그런데 <거미여인>은 대중에게 각인된 그런 ‘게이’ 이미지 자체를 뒤흔드는 이야기였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정성화: 역시 사랑. 솔직히 몰리나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렇다. 몰리나는 여자보다 더 여자답다. 여자가 삐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포인트에서 삐치고, 사랑을 느끼는 부분에서도 더 많이 사랑을 느낀다. 여인의 감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람이 남자 몰리나다. 몰리나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주 굉장히 넓은 범위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객들에게 생각을 만들어주는 연극인데 난 그게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그것만 믿고 오로지 사랑만 생각하면서 공연을 한다.
그동안 해왔던 <맨 오브 라만차>나 <스팸어랏>, <거미여인>까지 외국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정성화가 맡으면 어딘가 한국에 실재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정성화: 외국 사람이라고 해서 외국 사람을 표현할 필요는 없다. 역할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워낙 토종스럽게 생기기도 했고. 허허허허.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면 그런 부수적인 효과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웃음)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드디어 2010년 제4회 더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특히 수상소감이 화제를 모았다. 그동안 계속 노미네이트되면서 수상소감을 매년 준비해왔다고 했는데 어떤 심정으로 그랬던 건가.
정성화: 올라가면 이런 말을 해야지 정도는 준비해왔다. 난 매번 내가 무조건 탈 거라고 생각하고 갔으니까. (웃음) 배우가 그 정도의 자신감은 있어야지. 그런데 그날만큼은 뭔가 적어가야겠다 싶었다, 부적처럼. 탈 것 같은 느낌이 조금 있었고. (웃음) 매니저한테 출력 좀 해오라고 줬는데 A4 용지에 그냥 크게 해온 거다. 좀 잘라서 가져와야되는데! 그래서 그냥 읽었더니 오히려 그게 득이 됐다. (웃음) 아무래도 뮤지컬을 하면서 처음으로 받은 상이기도 했고, 상황도 내가 한 얘기들도 좀 드라마틱했다. 그래서 이후 한국뮤지컬대상도 혹시 몰라서 가져갔는데 그게 부적인가보다. 그때는 절대로 안 탈줄 알았거든. 허허허.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수상소감을 어떻게 해야 되나 굉장히 고민이 된다. 더 세지 않으면 안 되니까 윗도리라도 벗어야 하나. 허허허허
뮤지컬 팬과 업계 관계자 모두가 인정하는 수상이었던 만큼 좀 ‘앗싸!’ 하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 (웃음)
정성화: 사실 그랬다. (웃음) 이때쯤 되면 뭔가 한번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긴 했었다. <영웅>을 오래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도 받았으니까. 1등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분위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상을 받았고 굉장히 좋았다. 남우주연상 정성화, 이렇게 부르는데 ‘아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개그맨으로 출발해서 뮤지컬에 발을 들였고, 개그맨이라는 이미지를 벗으려고 한 적은 없지만 그 선입견에 치우친 것들을 배제하는 작업을 굉장히 오래했다. 나도 뮤지컬배우로서 여러분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라는 것들. 2003년에 시작해서 2010년에 그게 된 거다.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니었나보다.
정성화: 개그맨 생활을 그만두고, 드라마 주인공 사무실에 있는 직원 중 가장 웃긴 직원을 전전하며 설움도 많이 받고, 굉장히 잘할 수 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 같은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도 했다. 한편으로 상을 받고 생각한 것이 그거였다. 상을 받는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이 보상되는 것은 아니구나. 나는 지금도 드라마에 가면 주인공의 친구다. 주인공 회사 직원 중 가장 웃긴 사람이고, 여전히. 그것은 아직도 배우로서 해결해야할 숙제고,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해내서 그들에게도 뮤지컬처럼 좋은 걸 보여줘야 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기 있어야겠다, 라는 결심을 하게 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정성화: 방송을 할 때는 내 직업이 너무너무 훌륭하고 이걸 끝까지 하다가 죽을 거야란 생각이 사실 없었다.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보다는 왜 나를 안 써주지? 왜 난 운이 없지? 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2004년 <아이러브유> 첫 공연 커튼콜 때 박수를 받으면서 그걸 느꼈다. 그때의 박수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박수는 너 진짜 잘했어 여기 오기 잘했어, 라고 관객 모두가 인정해주는 박수였다. 그 전에는 소녀들이 꺅꺅 거리면서 그랬다. 오빠 너무 잘해요, 못해도, 오빠 너무 잘 생겼어요, 못생겨도. 물론 그 친구들의 반응도 소중했지만 어느 정도 문화 쪽으로 눈이 틔어있고 박수를 쳐야 되는 사람과 안 쳐야 되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이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받았을 때는 이게 사는 거구나란 생각을 조금 하게 됐다. 그래서 그날 박수를 받고 그 이후부터 내 길은 뮤지컬이구나 싶었다.
그게 터닝포인트였나보다.
정성화: 그렇게까지 폭발적인 박수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습할 때 우리끼리 짓궂게 했는데, 공연이 올라가보니 관객들이 너무 심하게 재밌게 보는 거다. 끝나고 엄청난 박수를 주시는데 뭐라 형연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만 쏟아졌다. 그 전에 드라마를 하면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언제일까, 난 언제 잘 될까 싶었다. 부모님이 남들에게 “우리 성화 드라마 해”라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본적이 없고, 어디 나온다고 하면 “아~ 그 역할”이라 말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져오다보니 이곳에서 나도 뭔가 터닝 포인트를 맞아 정성화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겠구나, 라는 희망을 갖게 된 거다. 그리고 아직까지 잊을 수 없는 박수가 하나 더 있는데, 난생 처음 기립박수를 받았던 때다. 2006년 충무아트홀에서 <아이러브유>를 할 때였는데, 그때는 거기가 800석이었다. 내가 하는 마지막 공연 날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일어나는 거다. 여기에 비교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도박중독인 사람들은 몇 억을 따면 뇌에 도파민 수치가 높아져서 미친다고 하질 않나. 그리고 그 다음부터 행복지수가 거기까지 오르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게 뭔지 알겠더라. 허허허허. 그때는, 정말 짜릿했다.
그럼 그 이후로 행복지수가 그때만큼 올라간 적이 없나? (웃음)
정성화: 도박과 이것의 다른 점이 그거겠지. 내가 굉장히 열심히 준비한 날 관객들이 그런 박수를 보내주면 아까 말한 도파민지수가 엄청 높아지는 것 같다. (웃음)
하지만 얘기한 것처럼 무대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기능적으로만 쓰이게 된다. 두 영역에서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인데,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움직인다는 것이 느껴진다.
정성화: 물론이다. 마음을 비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얼마 전에는 카메오 출연제의를 받았는데, 이건 카메오가 아니라 그냥 단역이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안 할까라고도 생각했는데 그래도 내가 이것을 한다라는 것을 보여줘야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다. 주인공 얘기하는데 뒤에서 얼굴 반만 나오고, 몇 씬 되지도 않는다. 서럽기도 했지만 열심히 했다. 이게 지금 내 현주소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뮤지컬 팬 여러분들이나 이 업계 사람들은 ‘네가 왜 그런 짓을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인생 전체의 청사진을 놓고 봤을 때 10년 뒤나 5년 뒤에는 그 바닥에서도 인정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면 뮤지컬업계에서도 환영할만한 일이고.
최근엔 장르파괴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외부에서 뮤지컬로 유입되는 이들 만큼 여기서 TV나 영화로 진출하려고 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에게 역으로 조언을 해준다면.
정성화: 나 같은 경우는 어릴 적부터 그쪽 일을 해와서 거기 사람들에게는 뮤지컬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도 정성화는 뭐, 이런 분위기가 있다. 현재 뮤지컬에 계시는 분들이 타 장르로 진출할 때는 나보다 좀 더 좋은 조건으로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말 잘 해야 된다는 거다. 아무래도 큰 역할로 그쪽에 넘어가면 업계사람들에게 한번이라도 실망을 주게 되면 다시 하기 힘들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해야 된다.
뮤지컬, 영화, 드라마를 다 아우르고 있는데, 장르별 연기가 다르다고 생각하나.
정성화: 기본적인 궤는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카메라 연기와 무대 연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관객을 보고 하는 무대와 카메라를 보고 하는 카메라 연기는 결국 비슷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주변 환경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관객의 반응을 같이 치고 올라가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다양한 탤런트가 있는 만큼 오히려 쉽게 인지도를 쌓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대에 계속 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정성화: 타 장르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에게 감동과 행복을 주는 장소가 무대다. 여기서는 관객들과 실제로 플레이를 하면서 호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며 강약이나 템포 조절을 할 수 있다. 고무줄처럼 베리에이션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거지. 관객들의 반응조차 공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배우를 더 침착하게, 더 무대에 빠져들게 한다. 프라이드를 만들어주고 여기 계시는 분들은 모두 내편이다, 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무대는 못 떠난다.
스스로도 자신의 선입견을 배제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했는데, 그 처음이 <맨 오브 라만차>였던 것 같다. 그 작품으로 인해 무엇이 가장 많이 변했나.
정성화: 주인공 캐릭터가 많이 들어온다. (웃음) 그동안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카리스마 있는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저 친구가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한번 시도해보자, 라며 업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게 달라졌다. 아무래도 대극장 무대에서 흥하다 보니까 팬 여러분들도 그만큼 많이 생겼고. (웃음)
아직도 보여주지 못한 필살기가 있나.
정성화: 악역이겠지.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보고 싶다. 쟤가 저런 것도 하네, 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다. 내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 중 하나가 의외성이다. 정성화가 게이를 하네? <영웅>으로 흥하고 있는데 뮤지컬이 아니고 연극을 하네? 이런 것들. 악역도 그런 부분의 일환인 것 같다. <레미제라블>이 들어오면 자베르 경감을 해보고 싶다.
나오면 든든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던데, 어느 정도 도달한 것 같나.
정성화: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 그 결과를 안 보려고 한다. 그것을 재보는 순간, 그 다음부터 작업 속도가 굉장히 느려진다. 그 위치를 의지하면서 작업을 하게 되니까. 배우로서 제일 하지 말아야 될 일 중에 하나가 ‘내가 대한민국 뮤지컬계의 이 정도 위치야’라든지, ‘후배들에게 커피를 얻어먹어야 될 위치야’ 같은 생각으로 대접 받으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러는 순간 어디서든 하락세를 걷게 되어 있다. 언제나 앞만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맨 오브 라만차>에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되어질 모습을 연모 하겠나이다”라는 대사가 있다. 정성화의 앞으로 되어질 모습은 어떤 것인가.
정성화: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까지 목표를 잡아도 될 것 같다. 해외에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내 공연을 기웃거리는 사람. 늙어서도. 목소리가 받쳐주는 한은 5~60대에까지도 하고 싶다. 반드시 50대가 지나서 <맨 오브 라만차>를 해보고 싶다. 그때의 돈키호테는 지금처럼 파워는 없겠지만 엄청난 밀도를 가지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