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의 화신, Like
종종 사람들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줄거리를 읽는 것만으로도 버겁다고 말한다.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뮤지컬은 30년간 가족과 직장, 연인과 이웃 모두에게 버림받고 비난받다 기어코 죽음에 이른 한 여성의 삶을 다루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2~3년 사이 부쩍 달라진 젠더감수성으로 이 작품을 대한다면 마츠코에게 가해진 경제적, 육체적 착취와 각종 기만에 눈을 감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 비극의 지옥에서 끊임없이 먼저 일어나는 마츠코를 통해 빛을 낸다. 제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으로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여자. 동명영화에서는 이런 마츠코의 사랑을 “신의 사랑”으로 명명한다. “그녀만이 빛나고 있어”라는 가사처럼 마츠코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빛으로 타인의 삶을 변화시킨다. 메구미가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나가고, 류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쇼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는 ‘혐오스런’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진 생명력의 화신 마츠코를 통해 생의 에너지와 용기를 얻어 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덕의 대부분은 원작에 빚을 졌고, 그의 삶을 실시간으로 살아내는 ‘라이브’라는 뮤지컬의 장르적 특성에 기인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의도만큼 선명하지 못한 오리지널리티, Dislike
“사회 맥락 속에서 젠더에 대한 사회 담론을 더 부각하고자 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민정 연출가는 이 작품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상처투성이인 마츠코의 일생은 낡고 찢어지고 구겨진 대형 세트와 기울어진 작은 큐브로 구현됐다. 영화가 죽음을 계기로 마츠코의 생애를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해 돌아보는 방식을 택했다면, 뮤지컬은 조카 쇼가 마츠코와 관련 있는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 결과 뮤지컬 속의 마츠코는 “가문의 수치”인 동시에 “매 순간 진지한 사람”으로 이야기되어진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영화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마츠코의 감정도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 뮤지컬은 혐오의 민낯을 확인하게 하는 비난의 가사들처럼 여러 방식을 통해 사회 관계망 안에서의 여성의 삶을 조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원작이 갖고 있는 방대한 서사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관계를 모두 담으려다 보니 서사가 가진 필연적인 모순이 더욱 도드라지고야 말았다. 마츠코의 모순된 삶을 설명하고자 했다면, 돌아갈 수 없는 ‘집’이나 ‘얼굴’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살기 위해 더욱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회를 구현해내는 것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뮤지컬은 원작의 미덕과 창작진의 오리지널리티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다 서사의 설득력도, 감정의 개연성도, 불합리한 관계에 대한 비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마무리된 버전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