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뮤지컬 (스테이지톡)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보다보면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페터의 그림자를 산 그레이맨의 외형이 ‘사람의 아들’을 닮았으며, 작품의 시각적 요소들이 비현실적인 탓이다. 극이 시작되면 압도적인 구조물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무대 위 홀로 선 배우 뒤에서는 높고 거대한 LED가 그를 향해 전진하고, 미로를 형상화한 육중한 또 다른 세트가 머리 위로 내려오며 그를 압박한다. 이후로도 세트는 상하좌우로 널찍하게 확장되어 수시로 환상적인 공간을 그려낸다. 비비드한 컬러와 아방가르드한 형태의 의상, 익숙한 소재들이 낯설게 재배열된 영상과 팝업북을 연상시키는 소품, 그림자를 표현하는 우아한 움직임과 기묘하게 느껴지는 웅장한 음악까지. 눈앞에 펼쳐지는 무대에서 관객은 시공간을 예측할 수 없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림자를 판다’는 낯선 설정을 관객에게 이해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작품은 오히려 낯선 공간을 의도적으로 구현해 낯섦 자체에 집중하며 질문한다. 무엇이 우리를 낯설게 하는가.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이성적 판단이나 자기 검열이 낯설다는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뮤지컬은 관객이 페터 자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관객 역시 낯선 세계관에 던져진 그와 함께 그림자를 잃고 난 이후의 삶을 체험하며, 설정에 담긴 상징을 발견하고 인간에 대한 사유가 확장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페터와의 여행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그림자의 구체적인 상징이 아닌 그것을 잃음으로써 깨닫는 진실이다. 환대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탐욕과 소수를 향한 다수의 증오, 사소하게 생각하던 것의 가치까지. 특히 뮤지컬은 움직임에 공을 들임으로써 주제에 다가선다. 패터의 그림자는 가장 우아하게 움직이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각자의 그림자들과 추는 군무는 소수를 향한 다수의 혐오를 그려낸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물질적 가치에만 집중하는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관찰자이자 초월적 존재인 그레이맨은 종종 인간들의 언어를 지배하고, 유혹과 협박을 통해 그들의 이중성을 고발하며 말한다. “역시 인간이야.” 그러나 뮤지컬은 잘못된 선택을 되돌리려 노력하는 페터를 통해 무기력을 딛고 비로소 제 삶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인간의 의지를 그린다.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서사는 종종 대극장의 거대한 세트와 웅장한 음악에 짓눌린다. 구체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인 단어가 가사에 등장하며, 공연예술의 특성상 인물의 상황과 감정은 시·청각적 요소로 표현될 때가 더 많다. 하지만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작품은 낯선 무대를 통해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여러 어려움에도 가치를 지키는 것, 욕망에 매몰되지 않는 것,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역설하는 것은 아닐까. 어렵고 실험적이더라도 작품이 이야기하는 바에 더 집중하겠다는 뚝심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대극장 뮤지컬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