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지>는 전래동요처럼 시작한다.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웃으며 “리지 보든 도끼로 엄마한테 마흔 번”이라 노래한다. 이들의 가벼운 태도에서 느껴지듯, <리지>에는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가사다. 브리짓은 쪄먹은 양고기를 구워먹고 튀겨먹고 스튜를 끓이는 구두쇠 보든을 수시로 비꼬고, 엠마 역시 돈을 아끼려 팔다리를 잘라 작은 관에 시체를 넣었던 보든의 행위에 “송송”이라는 단어를 쓴다. 살해 현장을 “핏국물 좌자작”이라 묘사하며, 분노와 냉소를 담아내는 28개의 록 넘버가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향해 달려간다.
특히 리지가 친부와 계모를 살해한 후 벌어지는 재판 과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의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5,000달러는 부정확한 진술을 무마하는 용도로 쓰이고, 변호인단은 여성에 대한 잘못된 사회의 인식을 이용해 검사에게 역으로 질문한다. “모든 고결한 남성이 숭배하고 모든 관대한 남자가 사랑하며 모든 현명한 남자들이 은혜를 입었음을 인정하는 그 성별의 리지 양이 욕망과 분노와 힘 그리고 집요한 증오를 가지고 도끼로 살인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순 앞에서 무죄를 내놓는 남성 배심원들과 1시간 만에 사건을 서둘러 정리한 재판부도 역시 조소의 대상이 된다. 네 여성은 제 몸을 치렁치렁 감싸던 의상들을 벗어던지며 사회의 억압과 제 안의 편견을 조롱과 함께 날려 보낸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브레이크가 느껴진다.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가 무겁기 때문이다. 리지는 1막 내내 거주와 소득 등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당하고 친부의 성적학대를 경험한다. 가부장제가 가져온 사안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존속살해라는 결과는 살인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콘서트형 뮤지컬이었던 원작은 서사적 측면에서 봤을 때 헐거울 수밖에 없다. 한국 프로덕션은 “각 방에 처박혀 말없이 전쟁을 치르”는 피해 여성들과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 약자의 위치에 서있는 앨리스의 드라마에 집중한다. 이는 리지의 살인과 조력자들의 연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진지한 접근이다. 그러나 도리어 작품이 담아내려 했던 자유와 해방의 희열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피해와 폭력을 다루는 창작자의 태도는 중요하다. 도덕과 복수 사이의 갈등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주춤거림을 남성 살인자가 주인공인 작품에서는 본 적이 없다. <지킬 앤 하이드>와 <스위니 토드>, <쓰릴 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남성 살인자가 관객을 만났다. 하이드와 스위니 토드의 살인은 복수의 희열을 그렸고, ‘나’의 살인에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이 작품들은 피해자의 상황보다는 가해자의 서사에 더 많은 의미를 두었음에도 긴 시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의 <리지>는 의도와는 무관하게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가해자임에도 범죄의 이유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태도가 여성 살인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리지와 함께 분노하면서도 뒷맛이 씁쓸한 것은 이 기울어진 운동장이 여전히 느껴진 탓이다. <리지>가 더욱 자유로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