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이 매력적인 까닭은 매 순간 살아있기 때문이다. 적게는 수십 명부터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기에 모든 공연은 다르다. 특히 한국의 뮤지컬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와 달라 더욱 그렇다. 멀티 캐스팅은 작품 해석의 다양성을 높이고, 논 레플리카와 짧은 리바이벌 기간은 같은 작품이더라도 시대와 관객의 변화를 담아내며 전혀 다른 공연으로 탄생한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 역시 2007년과 2016년, 2019년의 공연이 모두 다르다. 프로덕션이 완벽하게 달랐던 초연은 제외하더라도, 연출가 에릭 셰퍼의 지휘 아래 움직인 2016년과 2019년의 작품이 다르다는 점은 앞서 언급한 한국 뮤지컬 시장의 특징을 말해준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나 프랭크 와일드혼처럼 서정적인 멜로디의 뮤지컬이 강세인 한국에서 예상을 벗어나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음악은 낯설다. 초연 후 10년 만에 돌아온 2016년의 <스위니 토드>는 대중과의 만남을 위해 ‘가벼움’을 선택했다. 조승우와 옥주현이라는 익숙한 배우들이 캐스팅되었고, 한국적으로 개사된 가사에 배우들의 능글맞은 연기가 더해져 작품이 가진 ‘블랙코미디’적 매력을 극대화했다.
반면 2019년의 <스위니 토드>는 ‘스릴러’라는 장르에 집중한다. 낡고 녹슨 공간을 촘촘하게 디자인해 ‘버려진 옛 런던’을 무대에 소환한다. 칙칙하고 그늘진 곳에 배치된 인물들은 산업혁명 시기의 음울한 기운을 담아낸다. 환풍기나 크기가 다른 창문 등의 요소들을 이용해 빛과 그림자의 영역이 명확해지자 사회적 계급이 직관적으로 표현됐다. 거리를 오가는 인물들의 메이크업과 의상은 기괴하게 디자인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몸과 조명은 타인을 향한 무관심을 대변하듯 극단적으로 움직인다. ‘스릴러’에 집중하며, ‘블랙코미디’적 요소는 인육파이에 관한 1막의 ‘A little priest’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라졌다.
장르적 몰입도가 높아지자 발견되는 것은 복수의 단면이다. 2막은 토드와 러빗 부인이 각자의 욕망을 실현한 후 변화한 생활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는 것에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1막 내내 소리를 내지르며 극도의 분노를 표현했던 토드는 2막에서 무표정하고 권태롭게 살인을 이어가고, 러빗 부인은 토드와의 공동 작업으로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유머는 사라졌고, 이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일상으로서의 살인이다. 개인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타인을 향한 마음은 사라지고 상황적 판단만이 존재하는 곳. 점점 짧아져만 가는 살인의 속도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감각으로 이어진다. 복수의 공감대는 옅어졌고, 인간을 향한 공포는 선명해졌다.
2019년의 <스위니 토드>는 양심을 잃어버린 이들의 최후를 그림으로써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지금 누군가를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스위니 토드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한 순간이다. 끊임없이 깨어있는 마음, 그것이 올해의 에릭 셰퍼가 관객에게 전하고픈 말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