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조정석은 공교롭게도 관객을 기만한 남자가 됐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먼저 본 이라면 느물느물한 납뜩이에게서 “웃자고 하는 말에 정색하는” MBC <더킹 투하츠>(이하 <더킹>)의 은시경을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고, 반대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기타 치며 ‘소녀’를 부르던 은시경에게 “아구창을 날릴까?”라 말하는 납뜩이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는 <헤드윅>부터 <내 마음의 풍금>, <스프링 어웨이크닝>에 이르기까지 조정석의 뮤지컬 무대를 줄곧 봐온 이들에게도 익숙지 않은 변화다. 단순히 그가 활동하는 공간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잘 안다고 느꼈던 그에게서 또 다른 매력이 도출됐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그를 다섯 가지 이야기로 살펴보았다. 조정석을 처음 만난 이들에게는 신선함을,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왔던 이들에게는 변치 않아 다행스러운 안도감을 안겨줄 것이다.
납뜩이 vs 조절
“납뜩이처럼 나도 그 당시 진짜 힙합바지에 맨투맨 티셔츠, 노티카 잠바를 입고 다녔다. 심지어 추리닝까지 힙합바지로 입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고등학교 때 사진 보면 헤어나 옷 스타일이 완전 똑같다. 아마 내 친구들이 영화 보면 “조절, 고등학교 때 같아!”라고 얘기 많이 할 거다. ‘조절’은 중학교 때부터 별명인데, 조잘조잘거려서는 아니고. (웃음) 왜 이름 앞글자만 따서 부르는 친구들이 꼭 있지 않나. 조정, 조정 이렇게 부르다가 조~절 이런 식으로 리듬이 붙더니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트위터 아이디(jojeol)도 그거네! 납뜩이와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사실 납뜩이는 그 당시의 나보다 살집도 더 있고, 즐겁고 장난스러운 일상의 조정석에서 더 많이 나갔던 캐릭터다. <건축학개론>이 첫 영화라 스크린에서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설레는 감정이 있었는데 사실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관객들이 많이 웃어주셔서 나중엔 풀렸지만. (웃음)”
싱숭이 생숭이 vs 동네친구들
“삼수를 했는데, 재수시절의 나는 참 열등감도 많고 어두웠었다. ‘친구들 다 대학 가서 노는데 나는 쌈지독서실에서 뭐야’ 이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런데 납뜩이는 그런 나에 비해 굉장히 밝고 건강했다는 점이 좋았다. 감독님이랑 얘기해보니 납뜩이는 별로 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데 집에서 하도 가라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좀 편안한 상태로 그려진 거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싱숭이, 생숭이도 만나는 거고. (웃음) 납뜩이에게 싱숭생숭이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동네친구들이 있었다. 재수생이었지만 친구 축제에 따라가서 놀고, 친구들 동네 오면 항상 만나고 그랬었다. 당시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에게는 그때가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기회였고, 그 친구들 덕을 많이 봤다. 친구들이 많은 편인데 하나같이 못된 애들이 없다. 지금도 걔네가 나에게 가장 힘이 되는 존재고, 걔네들 없으면 난 진짜 못 산다. 특별한 얘기 없이 그냥 담배 한 대를 같이 펴도 너무 편하다. 그런 게 진짜 친구 같다. 친구들이 영화를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보고 나서 파티 한 번 해야 될 것 같다. (웃음)”
기억의 습작 vs 기억의 습작
“영화를 보면서 과거의 승민이에게 이입할 때가 정말 많았다. 중학교가 남녀공학이라서 1학년 때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서연이처럼 방송반이었고, 둘이서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기억의 습작’을 정말 많이 들었다. 한 1년을 만났었는데 서로 수줍게 인사하고 떡볶이, 핫도그 먹으러 다니고 그랬었다. 근데 얼마나 순진했냐면 그런 데이트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만나도 말도 잘 못하고 그랬었다. 그때는 숫기가 정말 없었다. 그래서 진짜 승민이 같았던 거지. 그 친구는 지금 애 둘 난 엄마가 됐다. 당시에는 나만 여자친구가 있어서 납뜩이처럼 사짜 카운슬러였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친구들이 다 ‘오~’ 이랬었는데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거! (웃음) 지금은 오히려 연애상담을 해주기보다는 받는 편인 것 같다. 주위 친구들이 참 답답하다는 말을 많이 해줬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럴 때가 많다. 근데 연애상담이라는 거 나보다 훨씬 경험이 풍부한 친구한테는 듣고, 그렇지 못한 친구들한테는 내가 해주고 다 그런 거 아닌가? 다 약육강식인 거다! (웃음) ‘기억의 습작’은 지금도 친구들끼리 노래방 가면 옛날 생각하면서 부르는데, 화면에 ‘기억의 습작’이라고 뜨면 애들이 다 같이 ‘아~’ 이런다. (웃음)”
스물 vs 서른셋
“납뜩이도, MBN <왓츠업>의 병건이도 신입생이거나 재수생 역이었다. 어린 친구들과 연기하는 건 큰 불편함이 없었는데 그건 내가 워낙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랬을 거다. 그 친구들은 세대차이 느꼈을지 몰라도 나는 별로. (웃음) 하지만 행여나 연기할 때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많이 다가가려고 했던 것 같다. 뮤지컬은 연습도 오래하고 배우들끼리 합이 좋아야 좋은 공연이 나올 수 있으니 그런 부분의 영향을 없지 않아 받은 것 같다. 그런 캐릭터를 맡는 건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외모 덕분인데, 예전에는 동안이라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외모 때문에 오디션에서 낙방한 적도 있어서 ‘아, 왜!’ 이럴 때도 있었고, 부정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동안이나 노안이나 외모 덕분에 캐릭터가 분명할 수도 있고, 자기가 생각하지 못한 역을 맡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해 탓하지 않으려고 한다. 타고난 외형적 조건을 부인하는 순간, 자신을 부정하게 되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배우를 하겠나. 요즘은 동안이라 감사하다. (웃음)”
콤플렉스 vs 쾌락
“첫 번째 드라마였던 <왓츠업>은 워낙 준비도 연습도 많이 했던 작품이라 1년간 편성이 잡히지 않았을 때 처음에는 많이 속상했었다. 근데 뭐든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거고, <왓츠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이후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왓츠업> 덕분에 은시경까지 오게 된 거니까. <왓츠업> 편집을 도와주시던 이재규 감독님이 병건이에게 호감을 많이 보이셨고, 이후 <더킹> 작업하시면서 은시경에 나를 떠올렸다고 하시더라. 제법 큰 역을 맡게 돼서 나를 알던 사람들이 다 놀랐겠지만 나는 얼마나 놀랐겠나. (웃음) 은시경은 ‘했다 치고’ 같은 게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완벽해지기까지 가져야만 했던 마음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왕의 비서실장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엄청나게 대단한 아버지가 있고, 그에 못지않은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뭐든지 잘해내고 싶어 한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는 유함이 있다. 2회에서 부른 ‘소녀’도 그런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직접 선택한 곡이었다. 오래전부터 영화를 너무 좋아했고, 하고 싶어서인지 지금 하는 카메라 연기가 부담스럽기보다는 너무 신난다. 은시경이 콤플렉스로 움직인다면, 나는 쾌락으로 움직인다. 에피쿠로스학파 계열로.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