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판소리 소리꾼으로 3년 만에 무대에 선다. 『노인과 바다』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이자람: 지루함이 좋았다. 지리멸렬함 속에서 바쁘게 생각하는 노인이 너무 나 같았다. 언젠가 연습 때 지혜가 그랬다.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또 청새치를 잡으러 나가고 또 만날 것 같다고, 그 반복의 일상이 좋다고. 그 얘기를 생각하다 나도 3년간 본분을 까먹고 잘 쉬었다 싶더라.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했고. 아마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본분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공간과 사건이 다양하지 않고 등장인물도 적어서 판소리가 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이자람: 사실 이 작품이 긴 시 같아서 엄두가 안 났다. 판소리는 사건을 나열하거나 상황을 묘사하거나 어떤 것을 소개하는 게 많으니까.
박지혜: 소설을 읽으면서 목적자체보다는 노인의 과정을 공유한다고 느꼈다. 판소리에도 연극처럼 드라마의 구조가 있지만, 그것보다 앞서는 어떤 모먼트가 있다. 판소리는 체험이 중요하고, 『노인과 바다』는 그 목표와 잘 어울린다. 고기를 잡기 위해 노인이 분주하게 생각하고 몸을 쓴다는 것, 오래 갈고 닦은 기술을 바다에 펼친다는 것도 판소리를 한다는 것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과 기존 창작판소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자람: 작창가가 되게 많이 성장했다. <사천가>랑 <억척가>를 할 때만 해도 긴 호흡의 노래들은 자신이 없어서 가사로 쓰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통판소리만큼이나 소리 자체로만 공간을 바꿔야 해서 작창의 과정이 너무너무 어려웠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을 때도 모듬북이 들어오면 좀 더 편하게 ‘우루루쾅쾅’ 할 수 있지만 그걸 혼자 해내야 했으니까. 그런데 전통판소리들에서는 그걸 다 한다. 그래서 나도 했다. 곡 하나하나의 무게감도 달라졌고, 작창을 해내고 났을 때 장면 하나를 만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왜 전통에 가까운 양식을 택했나?
여신동: 자람이 전통판소리 하는 걸 <바탕>에서 처음 봤는데 충격적이었다. 이번에는 자람이 전통판소리다운 공연을 했으면 했다. 소리꾼이 소리로 관객과 함께 하는 것. 그래서 자람에게 잔소리도 엄청 많이 했다. “자기 자신을 믿고 혼자서 그냥 해!”라고. (웃음)
박지혜: 무대 위의 저 사람이 객석에 있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 간다 혹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인지하고 봐 준다 같은 느낌을 받은 건 그 공연이 처음이었다. 굉장히 행복한 관극이었고, 자람 언니가 전통판소리를 해야겠다 싶더라. 그래서 사실 『노인과 바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관객과 어떤 형태로 어떻게 관계 맺는 공연이 되느냐가 더 중요했다.
이자람: 이런 미션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통판소리는 100명 정도의 소리꾼이 달라붙어서 긴 세월동안 수정해온 음악이다. 그때 한 <수궁가>도 내가 10년 연마하면서 다루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이번 작품은 6개월밖에 없는데 뭘 어떻게 다뤄 만들기도 힘든데. (웃음) 못 알아들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했을 거다. 그런데 이들이 전통판소리에서 어떤 것을 봤고 무엇이 미덕이라고 느끼는지를 정확하게 알겠더라. 그러려면 10년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공연은 시작이라 생각한다.
여신동: 20년, 30년이 지나서도 <노인과 바다>가 누군가에게 불릴 수 있다면 좋겠다.
무대에 방석이 들어오는 것도 같은 맥락일까?
여신동: 옛날에는 어떤 공간에서든 관객들이 편하게 앉아서, 서서 판소리를 즐겼다. 그런 자유로운 그림이 떠올랐다. <노인과 바다>의 무대미술은 관객이 극장에 들어오면서부터 함께 하는 공연으로 느끼도록 진행하고 있다. 의상도 소리의 격에 맞는 자람이 예뻐 보이는 것으로 준비 중이다. 그동안의 공연에서는 텍스트에 맞는 컨셉추얼한 의상을 입었었다. 처음에는 어부 옷을 입어야 하나 해녀복을 입어야 하나 했었다. (웃음) 예전 같으면 바다와 같은, 예를 들면 파란색 같은 걸 생각할 텐데 그냥 자람한테 잘 받는 색을 선택했다.
이자람: 여신동이랑 알고 지낸 시간이 긴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짜 자람만 보이게 해줄 수 있는데”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여신동: 자람의 창작판소리를 볼 때마다 사람 자체가 빛나는데 여러 가지가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나는 자람이 관객들을 잘 초대해서 그 분들과 같이 잘 놀 수 있는 무대를 만들려 한다. 소리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미술로 구체적인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판소리라는 장르를 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혼자서 다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였다.
소리북을 제외하고는 악기도 빠지고 소리의 비중도 굉장히 높아졌다. 소리꾼이 감당해야 할 몫이 늘어난 셈인데 두렵지 않나?
이자람: 3~4년 전부터 누군가를 잡아 끈다는 건 혼자 죽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닐까 싶었다. 누가 손을 잡아주다가 죽건 혼자 누워 있다가 죽건 어쨌든 죽을 땐 두 발로 혼자 가야 한다. 그동안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진짜 컸는데, 지금은 혼자 잘 있기로 결심했다. 혼자인 사람들이랑 같이 모여서 작업하고, 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그렇게 살려고 한다.
박지혜: 노인의 낚시도 혼자 하는 거고 사람들도 결국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혼자 버티는 사람에게도 멀리서건 가까이서건 그를 바라봐주는 누군가가 정말 필요하다. 작품에 노인을 따라다니는 아이가 있는데 그가 그런 존재라고 생각된다. 자람 언니는 “나 같이 친구 없는 사람한테는 너무 슬픈 이야기잖아”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런 사람이 꼭 내 속을 모두 공유하는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오늘 연습실에서 스쳐 지나가는 누구이기도 하고 관객이기도 하다.
이 인물이 원작에서는 미겔이라는 소년이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소녀 니꼴로 변했다.
이자람: 지혜가 어느 날 몰리 팔머라는 여성 어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이 미겔 아닐까?” 하더라. 어부는 물리적으로 힘이 세야 하니까 남성이 많은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사진을 본 이후로는 어구를 메고 가는 사람들도 ‘사내들’이라고 했다가 ‘사람들’로 바꿨다.
박지혜: 여성서사를 억지로 담거나 끼워 맞추고 싶지는 않았는데, 청새치 잡는 사진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4시간의 사투 끝에 463kg의 청새치를 잡은 그 건강한 젊은 여성이 정말 멋지더라. 자람 언니가 소리 할 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노인이 자람의 선생님 같고, 자람이 제자 같은. 그런 이미지가 미겔을 소녀로 바꾸게 된 게 아닐까?
작품에서 청새치와 상어가 주요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셋에게 청새치와 상어란 무엇일까?
이자람: 나에게 청새치는 <억척가>다. 그 작품이 너무 커다란 스포트라이트와 성공, 압박과 권력까지 줘버렸다. 이 과정에서 붙은 권력을 떼어내기 위해 했던 모든 것이 상어 같다. 이제는 나이도 차서 나를 무시하는 것보다 어려워하는 쪽이 많아졌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변하려 하고, 변하지 않으려 좋은 척하는 내가 역겨울 때도 있다. 그 모든 것이 권력인데. 힘을 맛보지 않고 혹은 컨트롤하는 학습능력이 생겨서 깨끗하게 나의 좋은 면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섭다. 권력이 나에게 오는 것이.
여신동: 청새치와 상어 둘 다 나 같다. 나를 찾고 싶어서 놀기도 하고 연애도 했다가 일도 하는데, 그런 것들이 영원하지 않을 때 돌이켜보면 외부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선택한 거더라.
박지혜: 청새치는 어떤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어떤 미래인 것 같다. 상어는 나고. 미래 때문에 초조한 자아들. 두려움이라던가 조급함이라던가.
셋이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하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성향이 비슷해서인 듯하다.
이자람: 전부 자기 멱살 잡고 살고 있어. (웃음)
여신동: 그래서 편하다. 자람과 양손프로젝트 멤버들은 작업을 하면서 더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이들은 타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 무거운 문제들과 살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함부로 예상하지 않고 그냥 바라봐준다. 섭섭할 것 같지만, 그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작업하는 동료로서는 어떤 이유 때문에 서로를 찾는 걸까?
여신동: 나에게 이자람은 하나의 작품이다. 독립적인 아티스트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 모델 한 명을 데리고 사진 찍는 느낌이다. 돋보이게 해주고 싶다. 지혜랑 할 때는, 자신의 빈 공간에 정확히 내가 들어가게끔 해주기 때문에 같이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나의 어떤 지점을 신뢰하고 수용한다는 점?
박지혜: 작업 속도가 맞는 게 중요한데, 자람 언니랑은 템포가 맞는다. 작가, 작창가, 소리꾼으로 각기 다른 작업을 해도 수용을 잘해준다. 내 역할은 작가, 작창가, 무대에 올라가기 전의 훈련자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무대에 올라간 순간부터는 관객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신동 선배는 좋고 싫은 게 명확해서 그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내 선택도 명확해진다. 나는 텍스트적인 사람이니까 다른 감각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재밌다.
이자람: 소리꾼에 대해 지혜가 얘기할 때 감동받았다. (웃음) 이 사람들은 그걸 알아주기 때문에 내가 막 매달리고 같이 갈 수 있는 것 같다. 작가일 때의 나, 작창가일 때의 나, 소리꾼일 때의 내가 정말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같은 인간인데 뭘 저렇게 저런 체를 하냐고 한다. 이들은 정확히 다른 것을 알고, 내가 못 보는 걸 보게 해준다. 그러다가 소리꾼의 시간이 오면 정말 무대 위의 퍼포머를 열심히 봐준다. 사실 나는 보이는 것과 다르게 어려서부터 ‘쭈구리’의 마음이 있었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과 어깨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나도 잘나져야 한다는 사고로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스스로 평가절하하면서. 이 사람들이 나에게는 너무 커 보여서 처음 만났을 때는 무섭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가진 게 무엇이라고 얘기해준다. 이들과 계속 작업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작가와 작창가에게 박지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 좀 된다. 그냥 오래 살자.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