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시어터 <죽고 싶지 않아>, 류장현 연출가 (프로그램북 기재)

<죽고 싶지 않아>는 성적호기심, 외모 고민, 따돌림, 자살 등 총 10개의 장을 통해 청소년들이 처한 현실을 다룬다. 어떤 기준으로 이 이야기들을 담았나.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느껴지는 대로 움직이면서 엉뚱한 것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배치한 것에 가깝다. 예술가는 치열하게 만들 뿐이고,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내가 만든 것이 어떤 장르라고 명명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행하는 것 자체의 매력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댄스시어터라는 구분이 있긴 하지만, 굳이 장르를 명명하지 않아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다양하게 전달되는 무대였다.
내 작품이 경계에 있는 공연이었으면 좋겠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곳에 있는 새로운 것. 중요한 것은 싸우더라도 서로가 다양한 해석을 갖고 그것에 대해 가감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게 춤이라는 비언어가 가진 시적인 장점이 아닐까. 장르를 떠나서 틀을 깨고 자유를 갈망했던 이들이라면 이 작품과 불이 붙을 거다. 예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동작을 주는 것이 아닌 각자가 자신의 잠재의식을 만나게 해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낀다. 내가 여태까지 해온 것도, 잘하는 것도,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멈춰있는 이들을 경계로, 미지의 세계로 보내는 것.
어째서 경계로 가야 하는가.
나는 자기만의 틀을 만드는 순간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작품과도 연결이 되는데 나는 불안하고 흔들릴 때만 살아있다고 느낀다. 나에게 멈춤과 치우침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경계를 확인하고 부지런하게 리듬을 타며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유연하다는 것은 흔들리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그것은 곧 춤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있는 것은 멈춰있고, 살아있는 것은 움직인다. 이게 <죽고 싶지 않아>의 테마다. 그래서 쏠림과 경직이 많은 사회일수록 필요한 게 춤이다. 하나를 더 붙인다면 웃으면서 춤추자, 춤추면서 웃게 되자.
하지만 왜 춤인가.
내가 행복해지려면 내 몸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 내 존재를 찾는 가장 강력한 행위가 남들이 보던 안 보던 자신을 위해 추는 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서도 존재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몸을 움직여보면 심장이 뛰면서 더 직접적으로 알게 된다. 내 체력이 저질이라거나, 생각보다 지구력이 좋다거나, 불면증이 사라졌다거나, 더 이상 두렵지 않다거나. 나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어떤 영향으로 이어지는가를 확인하고 아는 것은 중요하다. 춤을 안 춰도 못 추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게 좋다는 걸 감각적으로 안다는 거다. 그런데도 안 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다. 춤을 통해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만나자는 거다.
몸을 통해 정신을 단련하는 것에 더 가까워보인다.
발견의 순간은 매일 온다. 단지 그걸 매번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에 가깝다. 내 몸이 하는 소리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콘셉트나 상황을 잡아서 장면을 만들려고 해도 이 순간 연습실에서 느껴지는 게 그게 아니다 싶으면 바꾼다. 즉흥에 가깝게, 채우기보다는 뺄 때 발견되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자기에게 솔직해지는 것과 힘빼기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세돌이 알파고와 대국하면서 신의 한 수를 둔 적이 있다. 인간과 알파고 모두 그 수를 해석해내지 못했다. 경험을 통한 직관의 한 수. 인간이라면 그것이 있다고 믿고, 나도 그걸 작품으로 두고 싶다.
2년만의 재공연이다. <죽고 싶지 않아>를 다시 준비하면서 고민하고 있는 건 어떤 지점인가.
왜 나는 스트레인저들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해 봤다.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국립극단 안에서도 나는 경계에 있다. 작품 후반부에 무리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I Will Survive’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죽고 싶지 않아>는 ‘네 주변의 모두가 너를 소외시키더라도 너만의 길을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작품이다. 이 질문에 모든 인간이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마녀사냥을 하지 않으려면 각자가 스스로 서있어야 한다. 당연히 쓴 질문이다. 하지만 ‘남의 인생을 살 거야?’라는 질문은 나를 포함해 이 시대, 이 사회에서 꼭 해야만 했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도움이 되었나.
청소년들의 피드백이었다. 작품에 누군가를 따돌리는 신이 있다. 따돌림의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어쩌다보니 쏠리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 아이가 우리 사회 어른들이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 소름이 돋았다. 어른은 쏠려 있지만 아이들은 열려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이들이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이 미래라고 하는데, 청소년은 현재다. 현재는 컨템포러리이고, 현재를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춤이다.
초연 당시 공연을 보면서도 ‘라이브’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적인 영상이 수없이 쏟아진다. 무대예술이 그 감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그런데 춤을 추면 땀방울이 관객에게 튀기도 하고 땀 냄새가 나고 극장에 습기도 찬다. 맨 몸이 만들어내는 그림은 투박하고 원시적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직관적으로 와 닿는다. <죽고 싶지 않아>를 통해 비언어가 갖고 있는 시적 영역에 대한 확신을 확고하게 더 다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