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크박스 뮤지컬의 일보 전진, Like
어디에서든 주크박스 뮤지컬은 성공확률이 낮다. 노래가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곡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지우기란 새로운 노래를 만드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가사가 직접적이면 직접적일수록 곡에 걸맞는 스토리를 구성하기가 어렵고, 가수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전체적인 톤을 잡기가 어렵다. <페스트>는 그동안 한국에 소개된 많은 주크박스 뮤지컬 중에서도 음악과 스토리의 결합도가 제법 높다. 서태지의 세기말적인 음악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혼란에 빠진 세계를 구현하기에 적합하고, 무언가를 뚜렷하게 지칭하기보다는 다양한 함의를 품은 가사는 생각보다도 해석이 폭이 넓어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할 수 있는 마음 변치 않는 모습 / 그렇게도 난 큰 빛을 얻었어”라 노래하는 타루의 ‘Take Five’는 다양하게 리프라이즈되며 자연을, 리유를, 희망을 노래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에서도 무기력을 딛고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리유가 부르는 ‘슬픈 아픔’은 비트감이 강조된 편곡과 더 높은 곳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동선이 결합되며 리유의 다짐을 포착해낸다. ‘시대유감’이나 ‘마지막 축제’ 같은 곡이 기존과 다르게 불려지지만 상황에 맞춘 편곡과 가사로 이질감을 최소화하고, 17곡의 뮤지컬넘버 외에도 다양한 서태지의 음악이 언더스코어로 깔리며 익숙하듯 새로운 서태지를 보여준다.
몰입을 방해하는 극단적 설정, Dislike
서태지의 음악이 오랫동안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는 분노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궤를 같이 하는 서태지의 음악과 카뮈의 <페스트>,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최우선에 두지 않는 한국의 현재적 분위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이 뮤지컬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뮤지컬 <페스트>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는지 80년 후의 미래라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관객의 예상을 빗겨간다. 뮤지컬은 근미래라는 시간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디지털과 회색, 직선으로 구현된 세트와 의상, 욕망제어장치나 웨어러블 기기 등의 여러 장치를 전시한다. 그러나 직접적이되 무리한 설정과 기타, 반지, 꽃 등의 아날로그한 정서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대하는 모습들은 후반부의 극적인 변화를 위한 장치라 하더라도 낯섦을 넘어 몰입을 방해하는 단계까지 왔다. 여기에 혼돈의 세계를 살아가는 캐릭터들마저 ‘명랑’(타루), ‘순수’(그랑) 등 하나의 단어로 쉽게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 전형적이다. 특히 악역으로 분류되는 리샤르와 코타르는 많은 것을 은폐하는 정부와 정경유착 등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클리셰들로 뒤범벅되어 지루함만을 안긴다. 국가적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 휴머니즘이라는 모두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2016년 가장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소 올드하고 뻔하다. 도전에 집중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페스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리셋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