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힘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를 설명하는 하나의 문장을 꼽으라면 이 문장을 꼽는다. 1인칭 서간문 형식의 원작소설은 독자를 적극적인 상상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독자는 때때로 편지를 쓰는 당사자 제루샤가 되었다가, 이 편지를 읽는 상대 ‘키다리 아저씨’가 된다. 원작은 제루샤의 감정을 충실히 담고, 키다리 아저씨의 존재를 숨김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에 반해 뮤지컬은 키다리 아저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제루샤의 편지에 영향을 받는 제르비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키다리 아저씨>를 사랑과 성장의 서사로 확장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뮤지컬의 80%는 제루샤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제루샤와 제르비스는 서로를 상상하며 편지를 쓰고 읽는다. 관객 역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행위를 통해 그들이 겪었을 상황을 적극적으로 상상한다. 구체화된 상상은 일기에 가까운 제루샤의 편지로부터 비롯된다. 편지는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그 사건에서 느낀 감정을 적는 것을 선택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속상함, 혼자서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 농장의 일을 배우며 깨닫는 감사함. 내밀한 감정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담는 편지는 관객과의 공감대를 빠르게 형성하고, 자칫 헐거워 보이는 작품에 촘촘한 살을 붙인다.
건반과 기타, 첼로로 구성된 음악 역시 인물의 감정을 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건반의 기본 멜로디 위에 어쿠스틱 기타가 따뜻한 무드를 만들어내고, 낮고 풍부한 첼로 사운드가 다양한 감정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특히 제루샤는 편지의 형식과 시간의 흐름을 서로 다른 창법으로 표현한다. 이는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는 익숙한 패턴의 지루함을 이겨내는 데도 탁월하게 쓰인다. 리트머스지가 서서히 물들어가듯, 감정에 집중한 음악과 가사가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자연스레 이끄는 셈이다. 음악이 제루샤의 감정을 청각적으로 담아낸다면,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의 성장은 공간의 이곳저곳을 바쁘게 누비며 스스로 의상과 장면을 전환하는 시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오래된 서재에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듯한 무대와 조명 역시 작품의 아날로그적 정서를 담아내며 소설과 다른 뮤지컬만의 매력을 만든다.
특히 2인극으로 변화한 뮤지컬에서 제루샤의 성장만큼 중요한 것이 제르비스의 감정이다. 제루샤 솔로에서 시작된 곡은 제르비스의 화음이 더해져 듀엣으로 변화한다. 관찰자에 머무르던 제르비스가 당사자로 진입해 제루샤와 동화되는 과정을 그리는 셈이다.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던 두 사람의 공간이 섞이는 것도 제르비스가 제루샤를 찾아오며 시작된다. 특히 2019년의 공연은 지난 공연들에 비해 제루샤의 편지에 반응하는 제르비스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서로의 영향력에 주목한다. <키다리 아저씨>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상대에 대한 마음이 어떻게 커지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신의 감정을 찬찬히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