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나빌레라>, 진선규라는 진정성 (스테이지톡)

오롯이 작가만의 세계인 2D가 3D가 됐을 때 가장 중요해지는 이들은 바로 작가의 세계관을 구현해내 줄 실연자들이다.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나빌레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명제의 증명을 충실히 해내고, 그 중심에는 덕출 역을 연기한 배우 진선규가 있다.
원작을 가진 2차 창작물이 모두 그러하듯, <나빌레라> 역시 다양한 한계와 가능성 위에서 뮤지컬을 시작한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70대 노인이 발레를 배우는 이야기는 2년간 56화에 걸쳐 연재되었다. 웹툰은 덕출의 감정을 비롯해 그의 발레 선생님이 된 채록과의 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이 넓고 깊게 펼쳐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무대 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에서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나빌레라>는 덕출이 경험하는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방식을 택한다. 자신의 병명을 확인하고, 친구의 장례식을 다녀오고, 유니타드를 사고, 발레단의 문을 두드린다. 당연히 이야기가 압축되는 과정에서 다채로운 결의 감정과 문제들은 납작해질 수밖에 없다.
이를 향한 돌파구가 실연자들의 몫이다. 사건에서 생략된 감정을 가장 직접적이고 압축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음악이다. <나빌레라>의 음악은 ‘꿈’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다루는 작품처럼 대중성을 추구한다. 익숙한 선율 탓에 멜로디의 진행이 쉽게 연상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가요처럼 느껴지는 <나빌레라>의 넘버들은 뮤지컬이 낯선 이들에게도 좋은 교재가 되기 마련이다. 또한 뮤지컬은 스냅사진처럼 순간의 기록이었던 2D를 벗어나 발레의 아름다움을 충실히 담아내려 애쓴다. 특히 덕출의 환영으로 등장하는 소녀의 발레 장면과 무대에 오른 채록과 덕출의 파드되는 그 어떤 말보다도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빌레라>가 담고 있는 내용이 자칫 잘못하면 진부해기 쉽고, 특히 70대가 20대에게 전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훈계처럼 느껴질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덕출이다. 진선규는 허허실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덕출로 등장한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발레를 배우며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관객은 빨리 마음을 연다. 진부하거나 다소 오글거리는 대사들도 진선규의 경쾌한 호흡 덕에 덜 민망해졌다. 특히 그는 가정에서든 발레단에서든 나이를 권력 삼아 군림하거나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고집을 부리지도 않는다. 덕출의 성실하고 우직한 행동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어하는 채록과 발레단 식구들, 성철이 스스로 변하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진선규의 몸은 덕출의 굽었던 등과 다리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미세하게 담아낸다. 그야말로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춘이자 좋은 어른이 진선규를 통해 발현되는 셈이다.
진선규는 최근 악역과 코미디성이 강한 캐릭터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무대 위에서는 오로지 ‘덕출’로만 기억된다. 캐릭터의 진심을 배우가 온전히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진심을 관객에 전달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다. 진선규는 <나빌레라>를 통해 ‘배우의 진심’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설득해내고야 만다. 그야말로 배우의 힘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