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에는 각자의 입장이 있다. 사람들은 그 입장에 맞춰 생각하고, 때로는 다른 이들과 대립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 누구의 입장도 정답은 아니라는 것 말이다. 모르는 것은 꺼내놓고, 현실에 비춰보고, 서로의 입장을 알아야 무엇이든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뮤德과의 동침’은 그래서 태어났다. 과거, 뮤지컬 VIP 티켓만이 인생 유일한 사치였던 기자와 뮤지컬 평론가 지혜원이 만나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는 시간이다. 열광도 비판도 뭐든 정확히 알아야 할 수 있다. 뮤지컬티켓 이슈에 이어 두 번째 시간은 ‘뮤지컬의 멀티 캐스팅 전쟁 편’이다.
둘은 더블, 셋은 트리플, 그럼 여섯은 뭐라고 부르나?
장경진: 며칠 전 (이하 ) 재공연 캐스팅이 발표되었는데 프랭크 역으로 엄기준, 박광현, 규현, 키, 김동준, 손동운이 결정됐다. 게다가 프랭크 외에도 해너티와 프랭크 부모는 둘, 브렌다는 넷이다. 다섯 캐릭터가 둘 이상이니 이론상 경우의 수는 192개인데, 공연은 약 100회 정도가 예정되어 있다. 현재 공개된 스케줄을 기준으로 봤을 때, 12월 셋째 주에 3회 공연을 하는 키는 매번 다른 브렌다와 키스를 한다. 캐릭터와 캐릭터의 만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이 다른 만큼 목소리도 성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뮤지컬이니까 말이다. 이러니 이들 사이에서 대체 어떤 케미스트리를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멀티 캐스팅, 국내뮤지컬시장이 가진 문제의 집합체
지혜원: 친구 중에 브로드웨이 스태프가 있는데 한국초연 당시 다섯 명의 프랭크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더라. 사실 멀티 캐스팅에는 국내뮤지컬시장의 문제가 총체적으로 담겨있다. 시장이 작다보니 대중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뮤지컬배우 외에도 인지도 있는 유명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스케줄상 주 8회 공연을 할 수 없으니 여러 명의 배우들로 채워서 공연을 이어가는 거다. 무대에 오르는 회차는 적지만 대신 ‘누구의 뮤지컬’로 홍보되기 때문에 제작자에겐 이점이 될 수 있다. 상업 장르니까 무턱대고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멀티 캐스팅의 가장 큰 문제는 공연의 톤과 완성도가 일정하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골라보는 재미? 의외로 더 안 볼 수도 있다
장경진: 멀티 캐스팅과 관련해서 제작사에서는 관객의 다양한 성향에 맞춰 골라보는 재미가 있을 거라는 말을 항상 한다. 하지만, 최근 공연되는 대부분의 작품 속 주요 캐릭터들이 무조건 더블 이상이라 베스트 조합이라는 걸 찾기가 너무 힘들다. 스케줄 변동도 있고. 그러다보니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거나 주연의 더블캐스트 정도가 아닌 이상 여러 번 볼 걸 오히려 베스트조합 단 한 회 관람으로 끝내기도 한다. 거기다 배우별로 사소하게는 대사부터 크게는 신까지 달라져 무엇이 완성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에는 이신이 비보잉을 하다가 문책 받는 신이 있다. 초연 유노윤호의 합류가 아니었다면 그 신이 만들어졌을까? 그가 전 회 공연을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비보잉을 할 수 없는 다른 배우는 그 신에서 대역을 쓸 수밖에 없다.
일정하지 않은 작품의 완성도와 일정한 티켓값 사이의 모순
지혜원: 같은 배역에 캐스팅이 많아지면 앙상블과 스태프들이 제일 고생이다. 뮤지컬은 연극에 비해 배우에게 맞춰야 되는 요소가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음역대는 기본이고, 앙상블과 함께 부르는 노래, 가끔은 안무나 연출도 수정된다. 심한 경우에는 동일한 작품을 봤다고 얘기하려면 동일한 캐스팅을 봐야 된다. 이번 한국뮤지컬대상에서 김준수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잘했으면 받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 작품이 정말 좋은 작품이라면 같은 배역의 모두가 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3명의 빌리와 4명의 마틸다는 각각 와 로 토니 어워즈와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동시에 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노미네이트도 수상도 배우 별로 따로다. 이건 배우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 자체가 다르다는 걸 혹은 별도의 작품이라는 걸 시상식이 증명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켓가격은 동일하다.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뮤지컬을 얕보지 마라
장경진: 는 초연 김준수의 영향으로 작품 자체의 인지도가 많이 쌓여서 재공연이 훨씬 수월했다고 들었다. 스타를 통해 뮤지컬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수익적인 면에서도 나름의 성과가 있을 거다. 하지만 의 경우 더블 캐스팅된 티파니를 앞세워 마케팅을 했지만 총 73회 공연 중 그녀가 무대에 선 건 단 11번이었다. 티파니 뿐 아니라 많은 스타들이 짧게 무대에 섰다 내려오고, 해외에서 공연되는 작품의 경우에는 K-POP 스타가 대부분의 캐릭터를 맡는다. 일본 공연에도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엠블랙의 승호와 지오, FT아일랜드의 최민환, 초신성의 성제, 제국의 아이들 캐빈이 출연한다. 현실상 멀티플 캐스팅이 어쩔 수 없다면 제발 캐릭터와 어울리는 스타를, 비중에 맞는 실력 있는 스타를 무대에 세워 달라. 가끔은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를 너무 얕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자존심이 상한다.
크리에이티브를 인정하지 않는 시장에서 누가 일하고 싶어 할 것인가
지혜원: 스타 배우를 캐스팅하면 대관도 선판매에도 이점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찾기보다는 일단 표를 팔아줄 수 있는 사람 데려오기 식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음역대고, 나이대고, 이미지고 다 차치하고 일단 캐스팅부터 하고 연습시키기 때문에 싱크로율이 좋을 수가 없다. 작품의 완성이 창작자가 아닌 프로듀서와 스타배우에게 무게가 실린 상태에서는 총책임자인 연출가의 입지도 보장받을 수 없다. 게다가 멀티 캐스팅은 완성도의 문제뿐 아니라 뮤지컬이 산업화되는 데에 있어서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창작자의 입지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데 누가 여기서 일하고 싶겠나. 작품의 기본이 되는 연출, 작가, 작곡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무대디자인이나 안무, 조명 등은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지 않은 이상은 주목받지 못한다. 배우에 앞서 작품 자체를 논해야하는 비평에서도 말이다.
뮤지컬배우들의 겹치기 출연도 멀티 캐스팅만큼 문제다
장경진: 멀티 캐스팅은 스타들의 유입도 큰 몫을 했지만, 실력과 티켓파워를 가진 뮤지컬배우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에서도 시작된다. 현재 공연 중인 작품과 다음에 공연할 작품의 연습이 겹치는 것은 기본이고, 공연 자체가 겹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너른 마음으로 이해한다 치더라도, 아예 이미지 자체가 달라져버리는 경우엔 정말 허탈하다. 하루는 애절하다가 하루는 신나다가. 트리플 중 한 명으로 캐스팅되었던 어떤 배우는 본인이 연기할 수 있는 날이 너무 띄엄띄엄 찾아와서 감을 잃는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배우 스스로도 몰입이 어려운데, 관객이라고 쉽겠나.
개런티에는 책임감도 포함되어 있다
지혜원: 만약 한 배우가 겹치기 연습이나 출연 없이 한 작품에만 몰두한다면 주 8회를 책임질 수 있다. 하지만 주 8회 공연을 1달 이상 해낼 수 있는 배우가 있는가도, 잦은 재공연 속에서 배우는 무엇으로 인정받는가도 문제다. 조정석이 한국뮤지컬대상에 참석했다가 그 다음날에는 대종상 시상식에 있었다. 모두가 같은 작품을 공유하는 영화에서는 ‘누구의 영화’로 손쉽게 설명되지만, 지금의 한국뮤지컬에서는 그게 어렵다. 그러니 겹치기출연과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배우들을 마냥 탓할 수 없다. ‘누구의 뮤지컬’이 되려면, 배우도 작품에 책임을 져야 하고 제작자도 그들을 서포트해줘야 한다. 1년간 의 장발장을 원캐스트로 소화할 정성화는 음역대를 맞추기 위해 올 3월 런던에서 1달간 트레이닝을 받고 왔다. 배우들의 높은 개런티에는 책임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공연을 하고 있는 배우들 중 얼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다.
현재의 해결책은 팀제 운영
장경진: 상황상 멀티 캐스팅이 계속되어야 한다면, 기본적으로 한 배역당 같은 수의 배우가 캐스팅되어 팀제로 운영되었으면 좋겠다. 올 여름 가 대표적이었는데, 정성화-남경주 페어가 원작에 가까웠고 고영빈-김다현 페어가 아예 새롭게 로맨틱한 커플을 보여줬다. 두 팀의 연출 콘셉트에 명확한 차이가 있었고, 연기 디렉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대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어려운 일이다.
할인티켓과 팀제 등 시스템을 구축하자
지혜원: 제작자들도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상업 시장에서는 일단 표를 팔아야 된다는 생각이 강할 수밖에 없다. 현실이 그렇다. 하지만 조승우의 는 회차가 정해져 있으니, 그가 무대에 서건 서지 않건 동일한 작품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관객의 재흡수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관객이 늘지 않는데는 그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스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작품의 일정한 완성도가 보장되어야 하고, 할인티켓제도가 유연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스타 배우의 휴가 기간에는 러시티켓의 숫자를 늘려 좌석을 채운다. 이런 제도들이 형평성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캐스팅의 팀제 운영도 절실하다. 팀을 나누면 그 팀의 배우들끼리만 연습하면 되고, 크로스 캐스팅은 오히려 이벤트성으로 더 호응도가 높아질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배우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과한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은 관객에게도, 제작자에게도 결국 좋은 성과로 이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