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판>, 낭독의 기술 (프로그램북 기재)

뮤지컬 <판>은 제목 그대로 빈 무대에서 일을 벌인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이 너른 마당에서 <판>은 기존의 판을 흔들고 새로운 판을 깐다. 관객은 익숙한 듯 낯선 공연을 보며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고민한다. 건반의 경쾌한 선율 위로 소금과 꽹과리가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방아타령을 부르다가도 다음 장면에서는 오페라 아리아 풍으로 노래를 부른다. 국악의 별달거리 장단을 카혼으로 연주하며 백성들의 분노를 대변하고, 사회의 각종 문제들이 인형과 탈을 통해 터져 나온다. 은밀한 듯 거침없는 성적 해학도 넘실댄다. 무대 위 배우들은 경계 없이 수시로 관객에게 말을 걸고, 관객과 즉흥으로 이뤄진 쌍방향 소통이 극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판>은 전통연희의 양식 위에 서양뮤지컬의 음악을 더한 작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마당놀이이기도 하고, 뮤지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판>은 자기만의 판을 찾은 새로운 공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화롭기까지 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은 <판>이 선택한 전기수라는 직업의 특성에서 비롯됐다. 전기수는 조선 후기에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엔터테이너였다. 청자의 호기심을 꾸준히 이끌어내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했다. 전기수가 펼쳐내는 쫀쫀한 낭독의 호흡, 다채로운 목소리와 톤에 청자의 몰입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이야기 속 인물이 곤란을 겪자 1인 다역을 하던 그를 칼로 찌른 실제 사건도 있었다.
<판>은 이야기의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작품 자체가 전기수인 셈이다. 이야기의 종류에 따라 말은 노래가 되었다가 탈춤이 되기도 하고, 꼭두각시놀음도 된다. 지금의 관객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만 있다면, 제 아무리 시간적 배경이 조선 시대라 하더라도 전통의 것이든 서양의 것이든 상관없이 등장시킨다. 이곳이 이야기 안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무대이기 때문이다. 희대의 전기수로 그려지는 호태가 양반가 자제인 달수에게 낭독의 기술을 전수할 때 들려오는 것은 놀랍게도 탱고다. “할 듯 말 듯, 풀 듯 말 듯” 청자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낭독법은 강약조절이 매력인 탱고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익숙한 판소리 대목과 핸드소닉 같은 전자악기부터 태평소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악기가 적재적소에서 분위기를 살려낸다. 창법에 있어서도 <판>은 국악과 양악을 가리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가 청각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무대에는 크기도 모양도 각기 다른 탈이 서른 개 있다. 탈은 기둥과 배우의 얼굴 위에서 매설방의 단골손님이 되었다가 억압에 봉기하는 백성이 되기도 한다. 목각인형을 이용한 극중극은 또 어떤가. 배우에 의해 재현되는 인형들의 세심한 움직임은 옹녀의 대담함과 벼슬아치의 탐욕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일곱 명의 배우와 아홉 명의 악사로 이루어진 무대지만, 빠른 호흡과 넘치는 에너지로 각각의 장면들은 관객이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당시의 전기수가 외던 소설이 수십 편에 달했듯, <판>이 전하는 이야기도 다양하다. <판>은 별다른 꿈 없이 살아오던 달수가 조선 최고의 전기수로 성장하는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달수는 호태와 함께 규방을 드나들며 자유를 억압받던 조선 시대 여인들의 삶을 발견한다. 여인들의 삶은 염정소설을 통한 현실 탈주에 그치지 않고, 덕이와 춘섬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춘섬의 매설방은 여성이 더 이상 신분과 제도에 가로막히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필사장이에 머물렀던 덕이도 조선 최초의 여성 광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과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주체적인 여성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공연시장에서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캐릭터의 등장은 그 자체로도 환영을 받는다.
규방이 성차별을 그린다면, 늦은 밤 저잣거리에서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단한 목소리가 있다. 군대 내 가혹행위와 차별적인 노동 환경을 고발하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삶의 터전에 대한 억울함이 무대이자 광장에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호태와 달수는 인형의 입을 빌어 부정부패와 검열을 일삼는 기득권을 향해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다. 눈치 보지 않는 풍자는 무대 안과 밖의 모두가 느끼는 답답함을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일등공신이다. 게다가 전기수의 풍자담은 공연이 여러 차례 진행됨에 따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 횡령으로 이어지며 <판>이 언제나 현재형이 되도록 돕는다.
다채로운 신명 속에서도 <판>이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태도와 각종 탄압에 맞서 싸우는 연대의 힘이다. 호태와 달수가 백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와 도덕을 어지럽힌다는 명목으로 전기수와 소설을 탄압하는 후반부, 백성들은 횃불을 들고 함께 ‘새타령’을 부르며 분노한다. 달수의 성장은 풍자를 넘어 부조리한 기존 질서의 전복으로 완성된다. 작품 속 성공의 경험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판>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넓지만 그 깊이는 다소 얕다. 인물의 관계와 조선이라는 시대가 가진 여러 한계에 집중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깊고 섬세한 서사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판>은 이런 가능성과 느슨한 이음새를 알고도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기 위해 노력한다. 어려운 시대에 앞으로 나아갈 힘은 개개인의 삶, 각자가 가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인간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만나게 될 사람들이 또 한 권의 책이 되고, 다양한 책을 함께 읽으며 서로가 느낀 바를 편견 없이 나누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