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은 윤형렬을 ‘곰렬’로 부른다. 둔탁한 움직임과 동굴에서 포효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던 <노트르담 드 파리>(이하 <노담>)의 콰지모도 덕분이다. 새로운 뮤지컬, 새로운 소리, 그리고 새로운 얼굴. 그는 <노담>을 통해 실패한 1집 가수에서 뮤지컬의 유망주로 우뚝 서며 2008년 신인상을 휩쓸었다. 콰지모도는 윤형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었지만 첫인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듯 가장 무거운 족쇄이기도 했다. 하지만 2년간의 공익생활은 그에게 다시금 행복과 의욕, 객관적인 눈을 갖게 했고 그 결과 한 여자로 인생을 새롭게 살기 시작한 <두 도시 이야기>의 시드니 칼튼은 훨씬 부드러운 음색과 다소 능글맞은 태도로 윤형렬의 새로운 가능성을 끄집어냈다. 그러니 그에게도 이런 노래 한 번쯤 불러줘도 좋겠다. 재주 많은 곰!
요즘 외국사극이 대세이긴 하지만 데뷔부터 지금까지 거의 가발 벗은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웃음) <두 도시 이야기>의 어떤 매력에 끌렸나.
윤형렬: 으하하하. 자꾸 시대극을 해서 그렇다. 외국사극이 많지만 <두 도시 이야기>에는 요즘엔 잘 없는 정통성 같은 게 있다. 다작을 한 건 아닌데 그동안 브로드웨이 작품을 한 적이 없어서 그 점에서도 끌렸고. 드라마도 너무 좋지만 시드니 칼튼은 캐릭터의 변화가 굉장히 극적이라서 나를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의 낙이 오로지 술밖에 없는 염세적인 남자가 사랑으로 변화하고 자신이 가족이라 믿는 사람을 대신해 목숨까지 버린다. 햄릿만큼 매력적이고 남자배우라면 누구나 탐내지 않을까.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점에서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랑 닮아있기도 하다.
소집해제 후 신작인데 현대극에 대한 로망은 없었나.
윤형렬: 현대극도 좋지만 고전이 없으면 또 현대극도 없는 거니까. 공익할 때 봤던 작품 중 <넥스트 투 노멀>의 게이브는 정말 해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아지니까 공연을 못 보겠더라. (웃음) 뮤지컬은 클래식에 기반을 둔 작품이 많은데 <넥스트 투 노멀>은 음악도 굉장히 현대적이었고, 내가 가수출신이기도 하고 실용음악을 했기 때문에 많이 끌렸던 것 같다. 내가 하면 노래는 끝장낼 수 있겠다 싶은 느낌이랄까. 으흐흐.
시드니도 콰지모도에 비하면 굉장히 부드럽게 노래하는 스타일이지 않나.
윤형렬: 콰지모도는 절절한 느낌을 내야 했기 때문에 성대를 많이 긁고 저음을 부각했었다. <모차르트!>의 대주교는 땅땅한 소리에 화도 버럭버럭 내야 하는 캐릭터였고. (웃음) 그래서 지금의 시드니가 음역대도 편안하고 잘 맞는다. (류)정한이 형이나 찰스, 루시 역들이 다 성악을 전공했는데 난 아니라서 오히려 그게 장점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허스키하고 저음이라 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웃음) 오히려 그게 더 시드니랑 맞지 않았을까. 술에 쪄든 사람의 목소리가 맑을 순 없거든.
지난번 프레스콜 때도 늘 술에 취한 캐릭터가 어렵지 않다고 얘기했던데. (웃음)
윤형렬: 그때 말 한 번 잘못해서 또 욕 엄청 먹었을 거다. (웃음) 근데 술, 좋아한다. 술에만 의존하면 안 되겠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확실히 방패막 하나쯤은 걷어주니까.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인데 팬들이 자꾸 꽃이랑 케이크, 도넛 같은 걸 사오길래 그냥 술을 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술을 준다. “확실한 조수를 선물해드립니다” 이렇게 편지도 써서. (웃음)
능글맞고 껄렁껄렁한 모습은 그동안의 윤형렬에게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윤형렬: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신선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색해하기도 한다. (웃음) 염세주의자라고 해서 모두가 우울하거나 예민한 건 아닐 거다. 힘들 때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무관심한 척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내 성격도 좀 그런 편이라 내가 표현하는 시드니도 그냥 ‘그래그래~어차피 내일되면 안 볼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툭툭 던지고, 남들 속일 때는 오히려 양아치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웃음) 특히 술을 좋아하는 캐릭터라서 내 술버릇을 써먹을 때가 있다. 긁적거린다거나 아무데나 막 앉는다거나 하는 것들. (웃음)
그랬던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제대로 인생을 살아보자고 다짐하고 그 가족을 위해 대신 죽는 게 스토리의 큰 줄기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나.
윤형렬: 대신 죽을지는 모르겠는데 (웃음) 시드니의 마음을 이해는 한다. 사실 시드니가 루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여자 하나 때문에 죽는다기보다 가족을 위해 죽는다는 게 더 맞다. 변호사가 될 정도의 서포트를 받았으니 못 사는 집안은 아니었겠지만 시드니는 아마 사랑을 못 받고 산 남자였을 거다. 그래서 루시를 통해 처음으로 따뜻한 감정을 느꼈을 거고, 그 딸까지 자기를 따르니 진짜 가족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소설에서는 시드니가 연적이라면 연적일 찰스에게 친구가 되자고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 죽기 전에 “그들이 내 가족이 되어줬어. 그래서 돌려주려고”라는 대사가 참 좋다.
연기하면서 가족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텐데 스스로는 좋은 아들, 좋은 오빠인 것 같나.
윤형렬: 사실 떨어져 있을 때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또 막상 만나면 5분 만에 싸우고 그렇지 않나. (웃음) 근데 그게 가족 같다. 나를 등질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더 기대게 되는 것 같다. 대신 여동생한테는 좀 엄하다. 부모님한테 대들거나 하면 용납 못하고 막 혼낸다. (웃음) 가족이야말로 그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 사이가 아니니까 있을 때 더 잘해야 된다.
그럼 집안을 풍비박산내고 시드니의 목숨까지 가져가는 찰스가 참 얄밉겠다. (웃음)
윤형렬: 가장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웃음) 근데 사실 1주일 전부터 찰스보다 루시한테 서운하더라. 찰스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어서 여길 떠나라고 하면 (임)혜영이 누나 같은 경우엔 “못 떠나!” 하면서 화를 낸다. 이런 매정한 여자가 있나 나는 보이지도 않냐! 한마디로 네가 대신 죽어주면 안 되냐?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 나도 생각하고 있긴 했는데 루시가 막 등 떠민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진짜 서운하다. 그리고 찰스를 구한 후에 루시가 시드니 편지를 읽을 때 가족들이 아빠 왔다고 막 좋아하는데 나는 쓸쓸히 뒤에서 노래 부르면서 퇴장한다. 그때 기분이 진짜 휴. 이게 정말 시드니한테 잔인한 극인 게 그 이후로 루시나 가족들이 시드니에 대한 이야기 한 마디를 안 한다. 대체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진짜 여자 잘 만나야 된다 싶기도 하고.
더블 캐스팅된 류정한은 이 작품을 통해 정의와 진실을 이야기 하던데. (웃음)
윤형렬: 형이랑 그것도 좀 다르다. 단두대 오르는 신에서 형은 이미 예수가 되어 있지만 난 아니다. 그게 어울릴 것 같지도 않고. 시드니는 이성적인 사람이라 죽음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행동에 옮겼을 거다. 하지만 사람인데 죽음 앞에서 어떻게 의연할 수 있겠나. 그걸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두를 보내고 비로소 혼자 남았을 때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이켜보면 떨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호흡도 가빠지고 손도 떨리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떤 공연을 하던 ‘정말 그럴까?’를 생각하는 편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도 ‘겟세마네’가 감동적인 건 예수지만 죽어야 되는 순간 왜 그래야 되는지에 대해 고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을 표현해내고 싶다.
이해했다 해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기는 정말 어렵지 않나.
윤형렬: 쉽지 않다. 특히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가 굉장히 압축적인데다 가수로 먼저 시작해서 연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근데 공연을 쉬면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공익 1년차까지는 공연을 보면 너무 하고 싶고 부러워서 잠을 못 잤다. 끝나면 꼭 그렇게 술을 먹고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공익 주제에. (웃음) 그러다 점점 여유가 생기면서 마음을 좀 놓게 되니 관객의 마음으로 극을 볼 수 있게 됐다. 전에는 ‘내 신 잘하면 돼’라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전체 흐름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국가대표>의 김용화 감독님이 학교 선배인데 전에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가장 좋은 사진은 자의식이 결여된 사진이라고. 그 의미를 이제는 알겠다. 내가 보고싶은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3의 눈으로 보는 나의 캐릭터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연기하고 노래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두 도시 이야기>로 중간점검을 해보면 어느 정도 도달한 것 같나.
윤형렬: 막상 내가 하려고 하니까 잘 안 된다. (웃음) 그런 느낌이 왔다가 공연 시작하면 또 내가 해야 되는 것만 보이고. 그래도 애쓰는 중이다. 정한이 형 공연할 때도 많이 보는데 옛날 같으면 다른 배우들 연기 따라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시드니가 보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드니가 더 불쌍하게 보일까 연구하기도 하고.
군대가 큰 도움을 줬네. (웃음)
윤형렬: 군대 가기 전에 이런저런 일이 좀 많았었다. 돈도 떼이고 회사 문제로 골치 아픈 일도 많고 주변에서 귀찮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배우로서 애매모호한 20대 후반에 군대에 갔고 서른에 제대로 시작할 수 있어서 오히려 잘 된 것 같다. 철없을 때 갔으면 그냥 이상한 군대놀이나 하다 왔겠지. (웃음) 내면 수련을 많이 했다.
공익생활에서 가장 새로웠던 건 무엇이었나.
윤형렬: 사실 공익은 군 생활이 아니라 직장생활이라 그동안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를 알게 됐다. 하고 싶은 일과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하나라는 거 그거 정말 축복이더라. 난 취미도 특기도 노래고, 일도 노래랑 연기다. 물론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냥 퇴근시간만 월급날만 기다리며 산다. 난 그동안 한 번도 돈을 벌기 위해 이걸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아마 한창 힘들다고 느꼈을 때 군대에 갔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이제 오랫동안 윤형렬을 지탱해줄 커리어를 제대로 쌓을 시기다. 어떤 기준을 갖고 관객들을 만나고 싶나.
윤형렬: 연기적으로 많이 배우고 풀 수 있는, 그래서 도전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하고 싶다. 앞으로 송스루 뮤지컬들이 많아질 것 같지만 그래도 연기를 해보고 싶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으니까 한다는 느낌은 싫고 정말 열심히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오랫동안 남으려면 내공을 계속 쌓아야 한다. 다른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뮤지컬에 그냥 발 하나만 걸치고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작품은 혼자 만나는 게 아니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거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좀 싫어하는데 그러다보니 나도 준비가 된 배우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도 노래가 강점이니까 그 매력을 십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에서도 보면 좋겠다.
윤형렬: <넥스트 투 노멀>이나 <엘리자벳> 같은 경우엔 음악이 단번에 확 꽂히지 않더라도 파괴력이 엄청나다. 그런 작품 해서 나도 한 번쯤은 ‘나, 노래 이만큼 해!’ 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다. (웃음) 그래서 노래하는 방송을 나가는 건 좋다. 내 앨범을 다시 내는 것도 항상 숙원사업이고. 여건이 쉽지 않지만 뮤지션은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음악이 나오는 것 같아서 급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다. 좋은 타이밍에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나.
윤형렬: 그거 아닐까? 가족한테 잘하자. (웃음) 생각보다 굉장히 가족뮤지컬이네. 으하하하. 죽음을 권장하는 건 아니지만 관객들이 뮤지컬을 보고 과연 내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